[구름의 역사] 78. 석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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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필자의 고희 잔치에서 작가 김수현(左)씨가 필자에게 기념패를 전달하고 있다.

김수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이 내 고희를 축하해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여의도의 전경련회관 20층 큰 홀에서. 가보고 깜짝 놀랐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김재순 국회의장, 각 방송사 사장 등이 보내준 화환이 꽉 들어차고, 방송인들이 대거 몰려 왔으며 임권택 감독 등 영화인, 박춘석씨 등 음악인, 최운지.김홍신씨 등 국회의원, 작가들, 탤런트들, 친지들. 커다란 홀을 꽉 채운 대행사였다. 오래간만에 아내를 데리고 갔던 나는 단상에 모셔졌다. 분에 넘친 영광이다. 왜 이런 대접을 받는가. 내가 진짜 뭘 좀 쓴 사람인가.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의견을 제시해 봤다. 인간은 이렇게 악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발해 봤다. 나라? 어디로 가느냐! 이리로 가야 될 것 아니냐는 주장도 해보았다. 남과 북, 싸우지 말고 어차피 우리는 '정의 민족'이니 다시 만나자고 애원도 해보았다. 진짜 난 사람들, 자기 분야에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쌓아온 학자, 실업인, 그외 분야의 사람들. 그들 속에 진짜 축하를 받을 사람이 있을 터인데 내가 뭔가?

영광이었다. 그때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지금 펼쳐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지금 젊은이들은 내 이름조차 모르는데….

조물주는 오묘하게 인간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적당한 시기에 점점 기력이 쇠퇴하게 해놓았다. 그렇게 초원에 나가서 돌면 상쾌하던 골프라는 것도 귀찮아지게 됐다. 돈도 많이 들거니와 파트너도 만만치 않다. 한두달 안 나가다보니 여간해선 나갈 기분이 안 생겼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점점 없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거의 발가벗고 다니다시피 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아도 호기심이라는 것이 동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서 너그러워진다. 그래? 그렇게 가려무나 하는 기분이다. 호통을 칠 충동이 생기지를 않는다.

이승만 박사 때 "거기 늙은이 비키시오!"하던 분노. 4.19 때 "잘 한다. 잘 한다"하며 박수를 보내던 정열. 5.16 때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라!"던 강렬한 요구. 6.29 때 "민중을 이해하라"던 충고. 젊은이들의 데모가 너무 심해 "얘들아, 그만하면 됐다"고 쓰다듬던 여유. 정주영이 소를 몰고 북으로 갈 때 "동해에서 선명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다"던 낙관.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열자"고 하고나서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역사 기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역사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유연히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낙관.

붉은 악마들의 가공할 파워. 한국은 항상 문제가 많은 나라지만, 언제나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는 안도감.

이제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 걱정하는 기분을 거두기 시작했다. 옛날 KBS 홀 연말 프로그램에서 김동건 아나운서가 나한테 질문한 적이 있다. "한국의 내일을 어떻게 보십니까?"나는 즉각 대답했다. "싸가지 있는 민족이야!"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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