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명랑의 영화풍경] 내 여자를 아끼는 단순한 원칙의 미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내 원칙은 단순하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 아끼고, 나라를 지키는 것!"

화약 연기와 모래바람 속에서 칼을 뽑아들며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던진 이 한 마디의 말.

"죽인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지(死地)로 떠나면서도 저런 말을 읊조리다니. 그 순간에 나는 정말이지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헥토르가 읊조린 그, '단순한 원칙'의 세계로.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는 시종일관 자신의 그, 단순한 원칙을 고수한다. 동생 파리스가 메넬레우스의 칼에 죽을 뻔할 때는 형으로서 파리스 대신 메넬레우스를 처단하고, 실수로 아킬레스의 사촌 동생을 죽인 뒤에는, 그러니까 곧 죽게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에는 곧장 아내를 끌고 지하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왜? 자신이 죽고 트로이가 멸망한 뒤에도 아내와 어린 자식은 살려야 하니까. 아내에게 도망가는 통로를 가르쳐준 뒤에야 비로소 헥토르는 칼을 집어든다.

"승자는 패자에게 그에 합당한 장례를 치러줄 것을 약속하게."

그러나 헥토르의 말에 아킬레스는 콧방귀를 뀔 뿐이다. 합당한 장례식 같은 소리하네.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인다. 죽여서 그 시체를 끌고 다닌다. 왜? 그야,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소중한 사촌 동생을 죽였으니까. 인류의 역사는 늘 이런 식의 이유들로 피를 부른다.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손에 죽었다는 것, 나는 이 점이 못마땅했다. 헥토르가 누군가? 내 여자 아끼는 것이 삶의 원칙인 남자가 아니던가? 그에 반해 아킬레스는? 아킬레스라는 인간(?)은 싸움질만 해대고, 게다가 당신은 왜 그런 삶, 그러니까 영웅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나요? 라는 질문에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거지. 그러니까 영웅으로"라는 식의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중증의 왕자병 아니던가.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그래서 다루기 쉽지 않은 아킬레스라는 사내의 칼에 헥토르처럼 처자식 아끼는 가장이 죽었다는 사실이 영 못 마땅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아킬레스 또한 보여준다. 아킬레스도 단순한 원칙 속에서 살았음을. 목마가 트로이의 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킬레스는 미친 듯이 내달린다. 사람 죽이려고 뛰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내달리는 것이다. 왜? 그야 찾아서 구해주려고. 그러니까, 결국은 아킬레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헥토르가 말한 '단순한 원칙'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비로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영화를 되도록 많은 수의 남성들에게 보여주겠다! 나름대로 결의도 다졌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동시대를 사는 수많은 남성들이 다시 예전처럼 '단순한 원칙'의 세계로 돌아가 주었으면 싶었다. 사실 요새는 남성들이 더 이상 예전의 남성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 '단순한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같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아름다운 헬레네가 부럽기도 했다. 단순한 원칙의 세계에 사는 한은 헬레네는 그저 예쁘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 시대의 헬레네들은 그저 예쁘기만 해서는 턱도 없으니 말이다.

이명랑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