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설득하는 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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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1933년 미국의 실업자는 1천2백만명이었다.성인 4명에 1명꼴이었다.대도시는 50%에 이르렀다.농촌도 소득이 70%나 떨어졌다.은행 주택융자의 40%이상이 연체였다.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절망의 시기였다.

국민 움직인 루스벨트 경제개혁과 사회보장을 내용으로 한 그의 뉴딜정책이 반드시 이상적인 것만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대책을 수립해 즉각 행동에 옮겼다.경제학자등의 많은 지적사항중에는 타당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다행히 정책들은 주효했고 2차대전도 승리로 끝났다.

결과를 따지기에 앞서 더 큰 의의는 국민을 움직이게 한 사실이다.좌절을 딛고 일어나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이다.그 열쇠는 명령이 아니라 설득이었다.취임 1백일안에 기자회견을 30번이나 가졌고 자주 라디오를 통한 대(對)국민연설'노변(爐邊)정담'을 통해 국민을 설득했다.그의 방송이 나갈 때면 국민들은 자녀들까지 끌어다 앉혀 놓고 경청했다.

지난주 워싱턴에서 그의 기념조각물 헌정식이 있었다.별세한지 52년만의 일이다.미국의 수도에는 이미 워싱턴.제퍼슨.링컨 등 세 대통령에 대한 기념물이나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그렇지만 루스벨트 기념물에 대한 미국인의 감회는 각별하다.

이날 2만여 방문객중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그에 대한 추모에 앞서 자신들의 과거 고난에 대한 회상 때문이었다.식량을 얻으려고 구호기관 앞에 줄을 서고,깡통과 담배 은박지를 수집해 군수공장에 보냈던 세대들이다.

명령 아닌 설득 통해 지금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노동법파동과 한보사태 이후 통치력 위기를 겪고 있다.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언제까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 제기에 수긍이 갈 정도다.그러나 그는 아직 침묵하고 있다.

국내외 여러 전례에 비춰 보면 대통령직 기능이 일시적으로 혼란스럽더라도 정부는 존속한다.워터게이트사건때 닉슨의 대통령직 기능마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건재했다.규정과 조직 지휘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과제의 하나는 자기 없이도 정부가 저절로 굴러가는 상태에 이르지 않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그저 일상적인 상황에 안주한다면 대통령의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편안한 일상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대통령의 정책의지가 전체 정부의 정책목표가 돼 매진해도 난관을 극복하기 어려운 판국인 것이다.

현재 金대통령은 심지어 자신이 임명한 국무위원이나 여당간부들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도 집권 초.중반과 차이를 느끼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특히 김현철(金賢哲)씨의 국정간여와 부패스캔들 사태 이후 국정표류상황은 더 이상 대통령의 영(令)을 제대로 세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증명한다.

대통령의 令 세우기 이런 때일수록 잔여임기의 정상직무수행을 위해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명령하는 대통령보다 설득하는 대통령으로의 자세전환이 필요하다.월남전때의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 말이 있다.자기가 임명한 장관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진정으로 내 사람이라고 할 장관은 한명도 없다는 얘기였다.모두 대통령보다 자기들,담당 부처부터 앞세운다는 말이었다.

본래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목표를 국정운영으로 연결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설득이다.대통령의 권한은 명령하라는 권한이라기보다 설득해야 하는 권한인지도 모른다.특히 지금 金대통령의 처지가 더욱 그러하다.

루스벨트가 후세 국민들로부터 기념조각을 헌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설득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 한남규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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