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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엔 세곡 운송 뱃길 … 1977년 말 끊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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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산강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남포강·목포강·금강·사호강·곡강으로 불렸다.『영산강 삼백오십리-물길따라 뱃길따라』(1995년)를 출간한 김경수(50·향토지리연구소장) 박사는 “영산강은 그 모양과 특징을 담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대체로 영산조창(榮山漕倉)의 기능을 살핀 영산강이 쓰이다가 근대에 이르러 유역권을 통칭해 사용됐다”고 말했다.

조창은 고려·조선시대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한 곳이다. 나주 영산포에 설치된 영산조창을 거쳐 조선시대 전라도 세곡의 절반이 뱃길로 서울까지 운송됐다. 내륙의 수로와 서남해 바닷길이 만나는 통로로, 포구로 추정되는 지명만 180여 개에 이른다.


72년부터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이 시작돼 나주·담양·장성·광주 4개댐이 세워졌다. 2단계로 78~81년 목포 동쪽에 길이 4.3㎞에 이르는 영산강 하굿둑이 들어섰다. 조수가 막힘으로써 77년 말 이후 사람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은 완전히 중단됐다. 번성하던 영산포 선창가는 쇠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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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교통 기능은 상실했지만 어로(漁撈)행위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영산강을 따라 200여 가구가 종사하고 있다.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0.5~5t 규모의 작은 배를 두고 고기를 잡아낸다. 바닷물이 드나들 땐 자라·황복·웅어를 포함해 어종이 다양했으나 요즘은 붕어·잉어가 주를 이룬다. 전남도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은 “영산강은 남도민의 젖줄로 생명선이었다. 하루빨리 본래의 풍요로운 자산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천창환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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