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곳은 남한뿐 깨달은듯 - 북한 농업투자.기술지원 요청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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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이 우리정부에 대북(對北)농업투자와 기술지원을 요청한 것은 구조적 식량난 타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고육책(苦肉策)으로 보인다.

최악의 식량난을 농업개혁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기도 하다.

외부원조같은 미봉책만으로 고질적인 식량부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한의 기술과 자본을 빌려서라도 파국은 막아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겉으로는 흑룡강민족개발총공사를 통해 한.중협력 형태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전제하고 있다.

북한의 기아(饑餓)에 동포로서 의무감을 느끼고 만족할만한 수준의 농업지원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남한 뿐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북한이 투자시범지역으로 제시한 남포(南浦)직할시 당국이 직접 곡물생산량과 비료.농약등 소요량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도표참조)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불과 수년동안 농업생산이 3분의 1이상 줄어들고 비료.농약공급이 절반이상 줄어든'누더기 농정'을 드러내면서까지 농업지원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북한당국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평양 남서쪽에 인접한 평야지대로 비교적 영농여건이 좋은 남포의 이같은 실태로 미뤄 여타지역의 낙후된 농업수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90년대들어 주체농법이 한계에 달한데다 김일성(金日成)사망이후 2년 연속 수해까지 겹쳐 김정일(金正日)체제를 위협할 정도의 식량난에 봉착했다.

북한당국도 이런 문제를 인식,지난해부터 개인에 대한 농산물 자유처분을 허용하는 분조계약제등 개혁조치를 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제의에 대한 우리정부의 입장은 일단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차원의 대북 식량지원과 거의 동시에 종자.농기계지원등 상당한 수준의 농업지원 조치를 취한다는 원칙이 서있는 만큼 시간문제라는게 한 당국자의 귀띔이다.

다만 4자회담등 남북관계 현안이 다소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라 일단 민간차원의 식량지원으로 숨통을 트게 한 후 근본적인 치유책을 제시한다는 복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물고기 몇마리를 주는 것보다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주는게 훨씬 효과적인 지원책이란 점에는 남북한이 모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지난 95년 귀순한 전북한농업기술자 이민복(李民復)씨는“북한측의 제의는 주체농법이 한계에 달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면서 “벼.옥수수등 다수확 종자와 농약.비료가 북한측이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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