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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정치회고록>1. 박정희 대통령의 위기관리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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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가에 중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총체적으로 나타난다.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냉철한 분석과 결단,의연한 자세로 위기에 맞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한.일 대륙붕분규다.76년 8월18일 오전 유엔군 장병 11명은 판문점'돌아오지 않는 다리'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에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가 경비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잠시 언쟁이 있은 후 북한군 70여명은 유엔군측을 습격해 도끼를 휘두르며 미군장교 2명을 살해했다.

슈나이더 미국대사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이 급히 朴대통령을 찾아왔다.朴대통령은 단호했다.

“68년 북한게릴라 30여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던 1.21사태등 지금까지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한국은 강력한 보복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미국이 조치를 취하지 않으니까 북한이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보고 계속 도발하는 것 아닙니까.이번에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잘라 말했다.朴대통령의 단호한 자세에 자극받아서일까.스틸웰대장은 20일 朴대통령에게 문제가 됐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작전을 보고했다.

“나무를 자를 때 북한이 무력으로 대응하면 미군은 북한으로 진격할 겁니다.우리는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출해 서울이 겪고 있는 서부전선의 위험을 제거할 것입니다.”“개성탈환이라니….”배석했던 나는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朴대통령은 즉각 동의했다.“그렇게 해야지요.그런데 작전의 제1선은 우리 군이 맡겠습니다.도끼만행으로 미군장교 2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는데….”

朴대통령은 배석한 서종철(徐鐘喆)국방장관.노재현(盧載鉉)합참의장에게 특전사 정예부대와 서부전선의 육군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그날 저녁 늦게 朴대통령은 두사람과 이세호(李世鎬)육군참모총장을 다시 불러 북한으로 진격할 때에 대비한 전략을 숙의했다.

드디어 다음날 작전이 시작됐다.건십 헬리콥터,F-4 팬텀전폭기,F-111 전폭기,괌에서 날아온 B-52 중폭격기가 4중으로 판문점 상공을 지켰다.한국해역에는 미항모 미드웨이가 들어와 있었다.

작전개시 20분후.“북한군 2백여명이'돌아오지 않는 다리'건너편으로 집결중”이라는 긴급보고가 내 전화를 때렸다.나는 바짝 긴장했다.“만약 북한이 싸우려들면 전쟁인데….” 나는 입안이 타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사진만 찍어댔다.오전7시55분 우리 작전반은 나무를 완전히 자르고 불법 설치된 북한초소도 때려부수고 유유히 돌아왔다.김일성(金日成)은 휴전후 23년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다.

작전이 끝났다고 보고할 때 朴대통령은 서재에서 다른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는“알았다”고 짧게 대답한 후 국방부 직통전화를 들었다.“장관,작전에 참가한 전장병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朴대통령은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70년 5월30일 한국정부는 한.일간 대한해협의 7만평방㎞를 한국의 대륙붕으로 공포했다.동시에 이를 제7광구로 정해 석유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양국간 중간지대를 경계선으로 하지않고 일본쪽으로 깊숙이 더 선을 그었다.그쪽에 깊은 바다밑 골짜기가 있으므로 국제법에 따라 그곳을 경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한국은 믿었다.일본열도가 확 뒤집혔다.“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중단해야 한다”“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등.열도는 반한(反韓)열기로 뒤덮였다.

朴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했다.정일권(丁一權)국무총리.김학렬(金鶴烈)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최규하(崔圭夏)외무장관.이낙선(李洛善)상공부장관등과 급거 귀국한 이후락(李厚洛)주일대사,그리고 내가 참석했다.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했다.

주일대사관의 의견은“일본측 주장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외무부는“국제사법재판소에서 우리가 꼭 이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경제기획원은“일본이 경제협력을 중단하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크게 타격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7광구 고수를 주장한 사람은 이낙선 상공부장관과 나 뿐이었다.朴대통령은 결론을 내지 않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심기가 불편한 것이 완연했다.나는 그날 밤을 설쳤다.나는 제7광구의 장단점,우리가 나아갈 길,대비책등을 정리했다.

다음날 아침 朴대통령이 집무실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건의했다.“각하,일본이 협력을 중단하면 우리 경제에 중대한 영향이 미치겠죠.하지만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수년을 견디는 것이 백년대계를 위해 더 필요합니다.또 제7광구는 해저자원이 무척 중요합니다.독도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주저없이 단안을 내렸다.“나도 어젯밤 여러모로 검토해봤는데 金실장의 건의가 옳은 것같아요.회의를 다시 열 필요도 없고 그 건의대로 합시다.”한국정부는 미국 코암사로 하여금 석유탐사를 계속하도록 했다.

70년 11월부터 72년 2월까지 한.일 실무자회의가 세차례 있었지만 양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긴장은 고조돼 갔다.과연 일본이 경제협력을 중단할 것인가.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72년 9월 일본은 뜻밖에 제7광구의 공동개발을 제의해왔다.우리의 대륙붕선언을 인정한 것이다.우리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석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영토확보'를 위한 朴대통령의 큰 결단을 잊을 수 없다.

<사진설명>

76년 8월18일 판문점 유엔군측 초소 근처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군을 도끼.몽둥이로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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