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나누기는 일자리 곱하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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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동부제철, 지금까지 감원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회사다. 외환위기 때도 버텼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기침체 탓에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가 사내외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던 참에 임직원들이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11월부터 과장급 이상의 급여를 30%씩 깎기로 한 것이다. 이 회사 홍보실 김현웅 차장은 “공식적인 선언은 없었지만 직원들의 고통 분담 노력에 회사 측도 사실상 고용 보장을 약속한 셈”이라고 말했다.

우리 근로자들에게 구조조정이란 말은 곧 감원으로 다가온다. 외환위기 때의 경험 탓이다. 하지만 감원은 구조조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꼭 사람을 내보내야 하는 법은 없다. 동부제철은 임직원들의 자진 임금 삭감 이외에 2000억원어치의 사모사채를 발행하고, 계열사 주식을 처분하는 등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이처럼 임금을 줄이되 고용을 지키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가동을 중단한 200㎜ 웨이퍼 공장의 직원 1000여 명을 300㎜ 웨이퍼 공장으로 전환 배치했다. 유한킴벌리는 나흘 동안 매일 12시간씩 일하고, 이후 나흘간은 휴무하는 2교대 근무를 통해 30%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얻고 있다. 급여를 줄여 정년을 늘리는 ‘임금 피크제’를 도입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모두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실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외환위기 때와 달라=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구조조정을 인력 감축과 동일시하는 미국식 구조조정은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 현 상황에선 위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는 통했던 미국식 구조조정이 지금은 왜 맞지 않을까.


국내외 경제여건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엔 기업들이 순식간에,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쓰러졌다. 정부도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됐다. 대량 감원을 통한 구조조정이라는 응급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지금 기업들의 체력은 괜찮은 편이다. 기업에 따라 차이가 심하지만 전체적으론 현금 보유액도 넉넉하다. 10대 그룹이 보유 중인 현금성 자산은 43조원에 달한다. 당장 사람을 내보내야 할 만큼 급하진 않다는 뜻이다.

해외 사정도 외환위기 때와 다르다. 당시엔 세계적인 정보기술(IT) 붐과 중국 등 신흥국의 성장에 힘입어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수출은 1323억 달러로 전년보다 2.8% 줄었지만 2000년엔 1722억 달러로 2년 만에 30% 급증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구조조정을 열심히 한다고 자연스럽게 수출이 늘 상황이 아니다. 주요 선진국들은 물론 중국·인도 등 신흥국들의 경제가 동반 침체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기 회복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김 연구위원은 “대규모 감원을 통한 구조조정은 내수 침체와 기업의 투자 부진을 불러와 불황의 골만 더 깊이 파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감원은 금융에도 충격=대량 실업은 기업과 가계의 자금줄 역할을 해야 할 금융회사의 부실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서강대 김경환(경제학) 교수는 “가계의 연체율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직 실업 사태가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인력 구조조정이 본격화된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업 사태→가계대출 연체→금융 부실화→대출 경색→개인 부도→대출 연체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한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2005년 493조원에서 지난해 9월 말엔 637조원으로 30%가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가계대출의 연체율은 1.12%에서 0.58%로 오히려 낮아졌다. 문제는 10월 들어 연체율이 0.67%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9월 중순의 미국발 금융위기가 국내에 본격적인 충격을 안겨준 시점과 일치한다. 그 뒤의 통계는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서서히 상승세를 타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윈-윈 구조조정’=외환위기 이후 노동계는 구조조정에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감원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도 부담스러워 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왜 근로자들이 먼저 당해야 하나, 열심히 일한 근로자가 무슨 죄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윈-윈’ 방식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고통 분담이 핵심이다. 당장 채권은행단 주도로 추진될 건설·조선 업체의 구조조정이 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이미 민주노총은 ‘일자리 나누기’를 새해 역점 사업으로 정했다. 2004년 일자리 나누기 협약에서 막판 탈퇴했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또 금속노조는 정부와 대기업에 정규직의 노동시간을 줄여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제안할 예정이다.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 나누기에 소극적이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의 입장도 적극적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고려대 김동원(경영학)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가 본격 궤도에 오르기 위해선 노사는 물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타협을 이뤄야만 한다”며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노조 측을 끌어안아야 일자리 나누기가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전국 단위의 노사정위원회가 아닌 산업별·지역별 노사정위원회를 여럿 만들어 일자리 나누기에 총력을 쏟자고 제안했다.

거국적인 일자리 나누기로 경제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네덜란드·독일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1982년 11월 경영자와 노조 대표가 마라톤 협상을 벌여 임금 삭감, 일자리 분배를 통한 고용 확대 등을 골자로 한 ‘바세나르 협약’에 합의했다. 당시 노조는 9%의 실질임금 하락을 받아들였고, 기업주는 노동시간을 5%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노조의 양보가 지나쳤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이는 네덜란드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활력소가 됐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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