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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황소 ‘30년의 동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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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소는 사람을 닮았다. 그것도 평생 묵묵히 노동하는 늙은 촌부, 우리 아버지들을 닮았다. 소의 해 벽두에 찾아오는 다큐 ‘워낭소리’는 늙은 농부와 그를 빼닮은 늙은 소 이야기다. 촌부와 소가 나누는 우정과 고단한 일생이 가슴을 먹먹하게 적신다.

화장기보다는 얼굴 가득 검버섯이 핀 다큐지만, 예상치 못한 쾌활한 웃음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감동이 있다. 다큐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늙은 소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 촌부의 얼굴이 겹쳐진다. 세상의 속도전을 거부하고 고집스레 땅을 지킨 늙은 아버지다. ‘워낭소리’는 이처럼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송가다. 어리석을 정도로 일하는 것밖에 몰랐던 모든 ‘노동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송가이기도 하다.

평생 땅을 지켜온 최원균 할아버지(80)가 30년간 그의 친구가 되어준 소 앞에서 잠시 쉬고 있다.

무대는 경북 봉화. 팔순의 촌부 최씨에게는 30년을 함께 해온 동반자 소 한마리가 있다. 소의 나이가 40살. 소의 평균 수명이 15년인 걸 감안하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늙은 소다. 기력이 쇠약해 한걸음 떼는 것도 천근만근이지만 하루종일 최씨와 함께 움직인다.

어려서 침을 잘못 맞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최씨에게, 소는 분신과도 같다. 농기구 없이 소만 가지고 농사를 짓고, 소가 끄는 마차로 거동한다. 그에게 소는 9남매를 키워낸 큰 재산이기도 했다. 이렇게 끔찍한 소이기에 사료 대신 꼴을 베어 먹이고, 그래서 농약도 일절 안 친다. 의사가 “일을 줄이지 않으면 큰 일”이라고 경고하지만 “기계를 쓰면 나락이 많이 떨어진다”며 구식 농법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이다. 함께 일하는 할머니의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소를 먹이다가 내가 죽을 지경”이라며 욕설반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자막없이는 해독불가에 가까운 할머니의 질박한 팔자타령은, 별 꾸밈없는 이 다큐에 웬만한 코믹 캐릭터 못지 않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방송 PD 출신인 이충렬 감독이 만든 HD 다큐다. 원래는 방송용으로 기획됐다가 규모가 커지면서 극장용으로 변신했다. 이 감독은 “방송 PD로 죽쑤던 30대 중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생겼고, 거기서 소와 농부 아버지 얘기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2000년부터 전국의 소와 농부를 찾아 해맸고, 2005년 경북 봉화에서 최씨 할아버지와 소를 만나 3년간 꼬박 촬영했다.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할아버지 내외의 마음을 얻는데 썼다”는 이 감독은 “할머니는 내용을 잘 아시지만,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저 사진찍은 줄 아신다”고 말했다.

‘워낭소리’는 지난해 독립영화계 최고의 화제작이다. 2008 부산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호평받았다. 이달 15일 개막하는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도 ‘월드다큐’ 경쟁 부문에 한국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초대됐다.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사람과 사랑을 울리는 워낭소리’ 등 감동적인 카피가 손색없는 영화다. 단 “쇠락한 고향을 닮은 농부, 농부를 닮아 건강이 좋지 않은 소를 찾아헤맸다”는 감독의 말이나, 최근 동물 다큐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의 의인화’, 소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등 다분히 ‘작의’와 ‘연출’이 느껴지는 대목은 다큐멘터리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논란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씨네큐브·하이퍼텍나다·씨너스 이채·대구 동성아트홀 등 전국 11개 극장에서 상영하며, 공동체 상영도 계획중이다. 제목의 워낭은 소나 말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단 방울 또는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를 뜻한다. 15일 개봉. 참고 blog.naver.com/warnangsori

양성희 기자

주목! 이 장면 추운 겨울날 소의 죽음이 가까워진다. 숨을 거두기 전, 할아버지는 소의 고뚜레와 워낭을 풀어준다. 평생 그를 구속했던 노동의 짐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동물과 인간이 서로를 연민하며 교감하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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