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週를열며>"혹시나가 역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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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푸른 움이 돋아나고 목련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성당 뜨락을 보노라면 시원하고 풍요롭던 마음이 신문이나 TV를 볼라치면 답답해진다.요즘 한보사건 청문회가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지만 혹시나 시원스런 고백 한가닥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가'역시나 그 물에 그 밥이구나'하며 실망하고 허탈해 하기를 수차례 거듭하다보니 남는 것은 답답한 마음뿐이다.

정치란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데 있다하거늘 요즘 세상을 보면 정치가는 있으나 정치는 없고 증인은 있으나 증언은 없으며,법률가는 있으나 법은 없으니 힘없는 다수의 백성들이 기대어 눈물자국을 지울 곳은 그

어디란 말인가.

질문을 던지는 국회의원들도,답변하는 증인석의 사람들도,조사하고 있는 검사들도 하나같이 국민의 불신을 받기는 마찬가지다.한보와 연관해 정치인 수십명을 또다시 조사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의혹있는 정치인에게 해명의 기회나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라는게 많은 국민의 생각이다.거기서 거긴데 누가 뭘 어떻게 조사하겠는가.

세상을 풍자한 이야기중에 아버지와 강아지 이야기가 있다.돈 많은 고관집에 어느날 밤 도둑이 들어와 아버지가 아끼던 도자기와 저금통장,어머니가 좋아하는 온갖 보석을 훔쳐갔다.아침에 일어나 온 가족이 난리가 났는데 그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영문도 모른채 쫄랑거리며 돌아다니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 발로 차면서“이 놈의 강아지 내다버려! 도둑이 와도 짖지도 않는걸 뭘해”라고 했다.그러자 강아지를 귀여워하던 그 집 딸아이가 아버지께“아버지,아버지가 잃어버리신 모든

것이 다 아버지가 도둑질해 가져오신 거 아닙니까.아버지가 정상적인 봉급으로 모으신 것이 아니고 다 도둑질해 모은 것인데 저 강아지가 누가 진짜 도둑인지 알아야 짖지요”하면서 대들었다고 한다.자녀들은 말이 없지만 부모가 하는 일을 냉

정히 보고 있으며,백성은 말이 없지만 정부 고관들이 하는 일을 냉정히 보고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어느날 왕과 왕비.재상 세사람이 모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기 속의 비밀 이야기 하나씩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다.그리고 만일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병풍 속에 들어있는 금계가 소리치고 울 것이라

했다.첫 번째로 왕이 입을 열었다.“나는 이 나라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다 내것이지만 때때로 백성들이 나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 주면 내 마음이 심히 기쁘다”고 말하자 금계가 울었다.다음 재상이 입을 열었다.“나는 이

나라 재상으로 내위에는 왕 한사람만 있고 모두가 내 밑에 있는데 매일같이 왕좌를 바라보며 나도 한번 저 자리에 앉아 봤으면 한다”고 말하자 금계가 울었다.세번째로 왕비도 입을 열었다.“나는 한 지아비를 섬기는 사람이지만 어전회의때

문무백관중에서 잘 생기고 건장한 신하가 있으면 저 사람과 교제해봤으면 하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역시 병풍 속의 금계가 울더라는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본능적으로 더 갖고싶고,더 높아지고 싶고,더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그러나 문제는 본능적인 그 욕망들을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밝아질 수도 있고 어두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욕망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는 거울을 보아야 얼굴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진실'앞에 서야 거짓과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자신의 잘못된 인생관을 교정할 수 있다.진실된 말 앞에서는 병풍 속의 금계도 운다는 중국 고사처럼 진실된 말 하나가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게 할 것이다.

묻는 자도 자신의 삶이 진실했던가를 먼저 묻고,답하는 자 역시 진실된 고백만이 백성의 숨통을 틔우며 용서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조사하는 사람도 스스로 먼저 진실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할 것이다.

金榮鎭〈정선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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