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이땅에 매카시즘의 망령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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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유럽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수사법(修辭法)을 빌려 "지금 한국 땅에 매카시즘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냉전시대이던 1950년대 초 미국의 진보적인 관리.언론인.연예인들이 극우 정치인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의 비밀청문회에서 공산주의 동조자로 낙인 찍혀 인격살인을 당한 사건이 악명 높은 매카시 선풍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한국인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말한 영어 잘하는 한국인들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지내야 하는 분위기는 한국판 매카시즘 냄새를 풍긴다. 매카시즘 냄새는 두 갈래로 난다. 하나는 정부(아직은 청와대가)가 주도하는 친미파(로 의심받는) 지식인 길들이기요, 다른 하나는 한.일 갈등에서 일본 입장을 조금이라고 두둔한다 싶은 사람에 대한 네티즌들의 온라인 응징이다.

우리는 지금 문화혁명 수준의 변혁을 겪고 있어 사회 구석구석에서 가치의 전도(顚倒)가 진행된다. 용공과 친북 대신 용미(容美)와 친미가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그런 변화의 하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용공.친북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큰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런 암울한 터널을 빠져나와서 당도한 데가 영어 잘하고 미국에 친구를 가진 사람들이 기죽어 살고, 독도와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의 대응이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 가수가 10여 년 하던 방송 출연을 못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 교수가 곤욕을 치르는 시대인가.

386이 장악한 한국은 전반적으로 북한에 너그럽고 미국에 비판적이다.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미정책의 방향도 그쪽에 맞춰져 있다. 북한을 포용하는 정책에 찬성과 비판이 있듯이 한.미 관계의 조정도 찬반토론을 거쳐서 그 방향과 수위를 조정해야 한다. 독도와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정책에 대한 일사불란한 지지는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것임을 노 대통령과 조기숙 홍보수석이 모를 리 없다.

언론이 한.미동맹을 흔들어 불안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신문 부수를 늘리는 안보장사를 한다는 조기숙 홍보수석의 주장은 책임전가요, 의도적인 도발이다. 그녀는 안보를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던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과 오늘의 언론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미동맹을 흔들어 신문 부수를 늘리기에는 한국 독자들의 수준이 너무 높다. 미국 정부와 연구소 사람들이 한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임이 영어 잘하는 한국인들에 있다는 말은 사실의 왜곡이다. 한국을 연구하고 한국에 대한 정책에 참여하는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 형성에 영어 잘하는 친미적인 한국인들의 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다.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사회는 역동성을 잃고 침체에 빠진다. 일사불란한 획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노 대통령과 조기숙 홍보수석은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이 쓴 두 개의 칼럼을 읽어 봤는지 궁금하다. 그는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자고 제의하는 칼럼에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는 독일의 전후 반성과 비교해 하수(下手)라고 지적하는 칼럼을 썼다. 와카미야의 처지는 대통령과 그의 홍보비서관에게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친미주의자로 지탄받는 한국의 학자와 언론인들, 네티즌들에게 몰매를 맞고 방송프로에서 쫓겨난 유명 가수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참여정부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다. 국민을 널리 참여시키는 인클루전(Inclusion)의 정부가 아니라 코드 안 맞는 사람을 가려 제외시키는 익스클루전(Exclusion)의 정부같다. 한.미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의 큰 몫은 친미 지식인들보다는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과 노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 및 외교부의 역할 위축에 있다. 한.미 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지식인들에 대한 매카시즘적인 공격은 원인 무효가 되는 것이고.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