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글로벌 코리안] 이토 히로부미 고향에 한국문화 심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 김우(左)사장이 부인 이문상 교수와 함께 해시계를 보고 있다.

"해의 그림자가 여기 있으니까 시차보정표로 계산하면 오전 9시27분이네요."

지난달 22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에 있는 간장식초.지역맥주 회사 '유즈야혼댕'(柚子屋本店) 앞 마당에 설치된 해시계를 보면서 이 회사 김우(57)사장이 말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맞다.

이 해시계는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앙부일귀(仰釜日晷)'다. 재일동포 2세인 김 사장은 "2년 전 이곳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한국 전통 문화.기술을 일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며 "일본 내 유일한 한국 해시계"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릉에서 해시계를 보고 감명받아 국내 전문가의 기술 지도 아래 돌로 복제했다"며 "이를 본 일본인들이 '550여년 전에 이렇게 정확한 해시계가 있었느냐'며 감탄한다"고 말했다.

김 사장과 그의 부인인 이문상(49)하기국제대 교수는 야마구치현의 '한국 문화 소개 선봉장'이다. 서울 출신으로 일본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 교수는 하기시 관광책자 등을 한글로 번역하고, 야마구치현의 대학.시민 강좌,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하기시는 한국과 '악연'이 있어 두 사람의 활동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1868년 도쿠가와(德川)바쿠후가 무너지고 근대 일본의 문이 열린 메이지(明治)유신의 태동지다. 바쿠후 말기의 학자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이 이곳에서 가르친 인물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한국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표적이다.

김 사장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 한국을 처음 찾은 뒤 우리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는 귀국 후 하기시에 가면.탈 등 한국 민예품을 파는 상점을 열었고, 한국 민예품 전람회도 개최했다. 부인 이 교수와도 민예품 수입관계로 서울을 들락거리다 만나게 됐다.

김 사장은 20년 전 하기시의 '일.한 친선협회'설립을 주도했고, 현재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협회는 다음달 초 이 지역 처음으로 '한국영화 감상회'를 열고, 오는 10월에는 재일동포 출신 한국무용가 김리혜씨의 공연도 개최할 예정이다.

김 사장은 "과거에는 많은 일본인이 한국 문화에 대해 우월감을 지녔지만 지금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기(야마구치현)=오대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