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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공기업, 구조조정보다 일자리가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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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주가와 원화 가치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금리가 떨어지니 ‘뭔가 되어 간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일부 정부 고위 관계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터무니없이 위기의식을 조장해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낙관도 금물이다. 이제 길고 어두운 터널의 초입에 들어갔을 뿐이다. 금융위기의 불길이 나라 경제 전체로 번지는 비상시국에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 은행·기업 등 모든 경제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 예전의 잣대를 고집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공기업 효율화(구조조정)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가 공기업의 효율을 10% 올리라고 밀어붙이니 공기업들이 지레 겁먹고 손쉬운 인원 감축부터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방만 경영을 해 온 공기업 수술에 반대할 명분은 없다. ‘공기업 민영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현 정부 입장에선 효율화를 내걸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다.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셌고 공기업을 내놓는다고 살 곳도 없으니, 민영화를 미루는 대신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술 타이밍을 잘 잡았는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요즘 모두 어렵다지만 공기업과 대기업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다.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들이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정부도 내년에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민간에서 직원을 줄이는 것을 최소화하도록 유도할 생각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이런 분위기를 읽고 구조조정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잇따라 밝히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인력 구조조정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수차례나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민간기업은 “공기업도 사람을 줄이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다”라며 감원에 나설 수 있다. 구조조정을 삼가라면서 정부가 먼저 구조조정에 나서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형국이다. ‘지금은 개혁보다 일자리 배분(job sharing)이 우선’이라고 과감하게 제안하고 싶다. 공기업별로 인건비 총액은 묶어두고 인턴· 계약직· 비정규직 위주로 일정 비율씩 늘리면 된다.

“그럼 개혁은 언제 하느냐” “고통을 겪더라도 부실이나 과잉 투자는 수술하고 가야 한다”는 등의 반론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사람 자르고 외형 줄여서 하는 개혁 대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개혁, 조직의 문화를 바꾸는 개혁, 공기업의 새 기능을 모색하는 개혁 같은 걸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각국이 재정지출을 늘리면서 저마다 에너지 사업 투자를 늘린다고 난리인데, 석유공사 같은 곳이 이번 기회에 외국에서 그런 기반을 확 늘리면 사람도 뽑으면서 미래 산업기반도 넓힐 수 있다.

최근 계약직 사원을 무려 2757명이나 뽑은 농촌진흥청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농진청은 연구소 9개를 5개로 줄이고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절감한 170억원의 예산으로 월 100만~130만원을 받는 일자리를 이처럼 많이 만들었다. 이수화 청장은 “개혁의 성과를 일자리 창출로 연결해 기쁘다. 내년엔 7000명을 뽑겠다”고 말했다. 이를 보고받은 이명박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의 모범 사례로 널리 알리라고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이 대통령은 평소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난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도 경기가 아주 어려울 때는 사람 해고 안 했다. 경기 어려울 때 내보내면 그 사람 먹고 살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자리 배분에 더해 신용을 보강해야 고용을 늘릴 수 있다. 시중에 자금이 돌지 않는 것은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은 거래 기업이 망하거나 담보로 잡은 부동산의 가격이 떨어질까 우려해 돈을 안 빌려 준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고 싶어도 자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못한다.

우선 은행이 기업을 보는 잣대가 달라져야 한다. 기업의 부실을 가리는 잣대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재무제표만 해도 올 3분기와 내년 1분기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날것이다. 상품이 안 팔리니 내년 1분기 재무제표는 최악의 상황이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은행 관계자들이 기업을 방문해 전기계량기도 살펴보고 최고 경영자의 자질이나 능력, 사업 전망을 두루 알아봐야 한다. 그런 다음 기업이 1~2년 안에 흑자로 돌아설 수 있다고 판단되면 지원 방안을 강구하자. 이런 기업을 위해선 신용보증기금이 총대를 멜 필요가 있다. 당장 현실적으로 쉽고 효과적인 것은 정부의 신용보증기금 출연을 확 늘리는 것이다. 이걸 늘린다고 다 돈 떼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때다. 추운 길거리에 실업자가 더 넘쳐나기 전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자.

박의준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