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대기업 부도 정부 불개입방침 문제없나 - 금융시장 안정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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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대기업의 도산이 이어지면서 금융시장이 신용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그동안 방만하게 자산을 운용해 온 일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의 누증(累增)으로 정부지원 없이는 도산 위기에 몰리게 됐으며,중앙은행의 통화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추가대출은 생각지도 못하는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됐다.이에 정부는'은행 및 기업의 부실책임은 당사자가 져야 한다'는 원론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 같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정책방향이 옳을지 모르나 과거 개발경제시대로부터 누적돼 온 부실을 청산하고 자유경쟁체제로 이행해야 할 우리 경제의 전환기적 어려움을 감안할 때 이런 정책대응은 문제가 있다.

우선 금융기관 경영에 있어 자기책임의 원칙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과거정리 절차가 선행돼야 한다.현재 우리 6대 시중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가 총여신의 1%인 1조6천억원이라고 하나 선진국의 엄격한 잣대로 재보면 이보다 훨씬 많은 2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에 따라 우리 은행들은 선진국에서는 금융기관의 도산으로 간주되는 지준(支準)부족 사태를 예사로 범하고 있는 실정이다.이젠 정부당국의 특별한 조치 없이 단순한 부실은행간 인수.합병만으론 은행의 경

영정상화가 이뤄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또한 이번 한보사태에서도 드러났듯 부실채권 누증 책임이 단순히 은행에만 있다고는 할 수 없다.왜냐하면 과거 정부는 산업정책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면서 은행을 정책자금의 중개소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정책대출과 부실채권이 누적됐기 때문이다

.정책금융은 아직도 은행 총여신의 50%에 이르는 실정이다.따라서 우선적으로 정부는 개입형 산업정책을 시장유도형으로 전환해 정책대출 규모를 획기적으로 축소시켜야 한다.그리고 과거로부터 누적된 부실채권을 청산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둘째로 은행의 책임경영 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그동안 시중은행들의

민영화 작업이 추진돼 왔지만 실질적 민영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인사권은 여전히 정부에 있고,정책대출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오히려 형식적인 민영화과정에서 경영에 대한 책임공백 상태만을 불러왔을 뿐이다.

이제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은행의 실질적인 주인을 찾아줘 은행

경영진이 은행관료들이 아니라 진정한 은행가들로 대체되도록 해야

한다.이를 위해 정부는 서둘러 민간자본의 은행소유에 대한 규제를

철폐해 책임경영 풍토를 확립하는 것만이 벼랑에 선 은행을 구출할 수 있는 길이다.

끝으로 혼란스러운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현재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대기업에 이르는 광범위한 부도사태로

금융기관들의 중개기능은 극도로 위축돼 있다.급기야 우량 대기업들마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어 신용위기로 인한 피해가 건실한 기업으로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지금은 부도사태로 야기되고 있는 신용경색 현상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서 진화해야 할 단계다.

이러한 노력들이 선행돼야만 우리 금융구조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답게 자기 책임하에 공정하게 경쟁하는

구조로 무리없이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정문건〈삼성경제硏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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