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칼과 펜의 강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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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가와 사회를 선도해가야 할 개인이나 집단이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큰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시는 인구가 10만명도 채 못되는 작은 도시이나 그 속에 하버드와 MIT의 두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그곳 주민들은 양대 명문대학과 함께 있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행동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많다고 한다.주민들의 착잡한 감정을 나타내주는 얘기가 있다.두대학의 경계지점에 큰 슈퍼마켓이 있는데 장사가 잘 돼 계산대마다 항상 학생과 주민들로 붐비는 편이다.몇가지 사지 않고도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특별카운터가 설치돼 있는데 거기에는'여섯개 이하(6 items or less)'구입자만 이용하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런데도 학생들 중에는 여러가지 많이 사들고서 얌체처럼 이 특별계산대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줄 뒤편에 서서 이런 학생들을 째려보면서 주민들은 이렇게 불평하곤 한다.“저 앞의 강심장들은 누구인가.팻말의 글은 읽을 줄 알

지만 산수에 약해 몇가지 샀는지 헤아릴 줄도 모르는 하버드 학생들인가,아니면 수학실력은 뛰어나다지만 글자를 제대로 못읽는 MIT학생들인가.”

최근의 국내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언론과 검찰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듯 싶다.정치가들은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하거나 비리.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사례가 하도 많다보니 국민들이 이들에 대한 기대와 신

뢰를 버린지는 이미 오래됐다.그러나 언론과 검찰에 대한 기대는 아직 높다고 하겠다.양대기관이 누구보다 앞서 사회악을 적발하고 공정하게 법의 철퇴를 내려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결과는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사건,한보사태,김현철(金賢哲)씨 문제 등이 표면화된

것은 민완한 취재보도활동이나 수사활동의 결과가 아니다.주로 어느

특정개인의 폭탄선언이나 양심선언이 계기가 됐던 것이다.문제는 이런

선언들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항간에는 소문들이 파다했다는 점이다.그래서 국민들은 묻는 것이다.“이

기관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정보가 어두운 무능기관인가,아니면 내용을

알면서도 힘에 눌려 표면화시키지 못하는 무력기관인가.”시장경제는

공정하고 신뢰받는 감시자와 법의

집행자가 있어야만 경쟁과 효율을 높일 수 있다.그렇지 못할 경우 한정된

자원은 비효율적인 부문으로 흘러갈 것이며 경제활동의 결과 발생하는

소득과 부의 정당성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이의와 불평이 제기될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전체의 불신풍조를 심화해 전반적인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게 된다는 것이다.경제정책을 두고 정부와 민간이

서로 믿지 못하고,생산자와 소비자가 불신하며,노동자와 사용자가 신뢰를

잃은 경제에서 기대할 바가 무엇이

겠는가.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이 돼야 할 기관들의 독립성과

중립성,그리고 신뢰회복은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케임브리지의 얌체학생 숫자가 자꾸 늘어난다면 참다 못한 주민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거나 멱살을 잡게 될 것이다.검찰에 대해서는 어느 기업인이

광고를 통해 분노를 폭발시킨 바 있다.언론은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제

모습과 제 기능을 찾아감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노성태(한화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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