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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공부는 그 자체가 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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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5일 오후 8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 성소로부터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한옥식 대문 뒤에 또다른 공간이 있다. 아담한 안뜰을 안고 있는 성가 수녀원이다. 부속된 교육관의 문을 열자 30석의 책상에 옹기종기 앉은 이들이 보였다. 지난 9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세 시간씩 성공회대의 CEO를 위한 인문학 ‘인문공부’ 강의를 듣고 있는 이들이다. 이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의 강의를 끝으로 1기 과정이 끝났다.

15일 오후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右)가 서울 중구 성공회 성가수녀원 교육관에서 ‘CEO를 위한 인문공부’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생들은 이날 3개월간의 강좌를 마쳤다. 18일엔 성공회대에서 수강생들과 종강 기념 콘서트를 연다.


기업 경영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강좌가 최근 인기를 끄는 가운데 성공회대의 CEO강좌가 눈길을 끈 이유가 있다. 성공회대는 ‘좌파 학문’의 산실이라 할 만큼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이 대거 포진한 대학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엔 대표적 ‘진보 논객’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강의도 있었다.

강좌를 책임지고 있는 신 교수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 좇는 세상에서 ‘인문학 공부’는 그 자체로 진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인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자는 의도로 강좌를 운영했다”며 “신자유주의나 물질 만능주의에 의해 파괴된 인간 심성의 회복을 인문학에서 찾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강생은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을 비롯해 ▶김연배 한화그룹 부회장 ▶김태구 넥솔 회장(전 대우자동차 회장)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이병남 LG인화원 원장 등이다. 수강생은 30명이 넘지 않는 소규모다. 박진선 사장은 “사교 목적의 최고경영자 과정과는 다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회사 일과는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다들 진지하다”고 말했다. 손혜원 크로스포인트 대표는 “인문학이란 바로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다. 기업 경영을 하는 이들이 ‘돈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이런 강좌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1기 강좌는 ▶그리스·이슬람 문명 ▶종교 건축 ▶바흐와 그의 시대 ▶실학사상가들과 같은 다양한 분야로 채워졌다. ▶재즈와 록 ▶축구와 현대라는 특색 있는 강의도 선보였다. 김태구 회장은 “CEO의 역할은 의사결정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인데 이는 경제·경영학적 지식만으로는 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기업 경영에 있어 인문학의 역할을 설명했다.

성공회대는 내년 3월부터 CEO 인문공부 2기 강좌에 들어간다. 이와 함께 ▶정치인 인문강좌 ▶문화예술인 인문강좌도 기획하고 있다. 신 교수는 “최근 최진실씨의 안타까운 사망 같은 일을 막기 위해 연예인들의 내면을 달래줄 수 있는 인문학 강의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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