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발전소'에서 '상수도'까지 이영구씨의 공간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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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하재봉이 95년에 낸 시집'발전소'에는 모두 56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이중 26편의 제목에'발전소'라는 낱말이 들어가 있다.발전소는 홍익대 앞에서 이름을 날리는 록카페인데 국내에선'Radio Activity'(방사능)란 곡을 불렀던 7

0년대 독일의 록그룹'크라프트베르크'에서 따온 이름이다.

90년대 들어 카페는 한 시인의 시집을 온통 채워버릴 만큼 문화적 관찰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하재봉이'발전소'에서 이 소비욕망의 실체를 파헤쳐 보려 했다면 카페'발전소'사장 이영구(36)씨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소비욕구를 한곳에 모아 하나의 조류로 드러나게 한 인물이다.그의 직업은'카페 매니저'.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공간

이 어떤 것이라는 걸 읽어 내 여기에 맞게 카페를 꾸미고 운영하는 것이다.

92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손댄 카페는 발전소.황금투구.상수도등 세곳.경기가 하강일로를 치닫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거친 카페는 모두 히트작이 됐다.비결은 화려한 실내장식도,맛깔스런 음식도,뛰어난 음악 선곡도 아니다.그는 다만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왜 이리 갈 곳이 없느냐”는 말에 귀 기울이고 잠재된 욕구들을 찾아냈다.

92년4월 발전소를 열때 이씨의 구상은'친밀한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기존의 나이트클럽은 디스코를 추는 시간대와 블루스 시간대가 분명하게 나눠져 있다.음악을 트는 DJ가'디스코 춰''이제 그만 쉬고 블루스 춰'라고 명령하는 구

조다.손님들은 그 명령에 맞춰 움직인다.앉는 자리도 좌석 구분이 분명해'이 팀'과'저 팀'의 거리가 멀다.대화를 하려면 팁까지 줘가며 웨이터를 보내야 한다.주문도 양주 한병과 안주하나의 격식을 갖춰야 한다.

발전소

의 좌석은 그러나 간이의자처럼 작고 간격도 좁다.좌석구분도 불분명해

누가 누구의 일행인지 모르게 섞여 있다.늦게 가면 자리도 없이 서 있어야

한다.그것도 차가운 철판 위에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벽을 보면서.천장은

공포스런 전선으로

장식돼 있다.

한마디로,통일된 좁고 음산한 공간에 사람들이 붐비게 만들어 놓았다.그

안에 놓인 사람들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을 수도 없고 일행끼리의

오순도순함도 방해받는다.발전소라는 공간은 고립된 개인주의와 배타적

가족주의를 구조적으로 차단한

다.

“처음에 농악판같은 공동체적 놀이공간을 생각했어요.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가 서로를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을 없애는 게 중요하잖아요.”

이씨는 술은 캔맥주 하나로,안주도 새우깡 하나로 메뉴를 통일했다.양주

한 병을 가운데 놓고 마실 때 그 좌석이 갖게 되는'중심'을 없애기

위해서다.스테이지에는 가마솥 같은 큰 쇠그릇을 놓아 두었다.다 마신

캔맥주통을 발로 빠개 좌

석에서 여기에 골인시키도록 하면서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다.이처럼 사소한데까지 이씨는'사람끼리 통하는 놀이공간'을

연출했다.

이씨의 두번째 작품은 얼마전'명월관'으로 이름을 바꾼'황금투구'.시인

하재봉씨가 운영하고 있던 황금투구를 95년3월 인수한 이씨는 석달만에

썰렁했던 이곳을 제2의 발전소로 만들어 놓았다.기본개념은 발전소와

비슷하지만 여기서는'서서

마시기'와'인테리어 참여'를 실험했다.붐빌 때는 1백50여명이 들어가는

이 곳의 좌석은 30석이 안된다.앉아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분위기가

시들하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인테리어도 원래 있던 것을 뜯어 내고

의자건 장식물이건 손

님이 옮겨 놓으면 거기가 제 위치인 형식으로 재배치했다.

그러나 황금투구를 넘기고 올 1월'상수도'를 시작하면서 이씨는 전략을

수정했다.상수도는 발전소나 황금투구에 비하면 타깃층이 훨씬

소수다.40%정도가 외국인 영어강사들이고 한국인들도 해외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음악은'트랜스'

(전부 기계음으로 만든 음악으로 테크노에서 변형.발전된 양식)를 주로

틀며 DJ도 외국인이다.

이씨는 카페에서 만난 40대와 20대가 같은 정서적 취향을 매개로 한

자리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풍토가 싹트는 것 같다고 한다.발전소에서

상수도까지,카페 안의 풍경만 보면 한 개인이 편안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한결

넓어진 느낌이다. 〈남재일 기자〉

<사진설명>

카페'발전소'는 잠재된 욕망의 일단을 분출시키는 장소로 명성을

날렸다.카페 매니저라는 신종 직업을 만든 이영구씨의 작품이었다.그러나

욕구는 변한다.카페'황금투구''상수도'도 금방 낡을 것이다. <장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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