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인생은 마라톤, 인문학이 기초체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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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메디컬스쿨(의과대학)·비즈니스스쿨(경영대학)·로스쿨(법과대학)·엔지니어링스쿨(공과대학)·저널리즘스쿨(신문방송대학) 등은 모두 전문직업인을 위한 단과대다. 반면 인문대·사회대·자연대 등의 단과대에는 ‘칼리지’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이름이 다르다 보니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수준에도 차이가 난다. 먼저 인문학 교육은 기초학문의 훈도를 통해 지식을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소양과 지력, 그리고 논리적 사유를 갖추는 데 목적을 둔다.

학문하는 방법,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나아가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키워나간다. 대학 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미국에선 불문과를 나와서도 의과대에 진학할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힘으로써 인간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소속 대학들이 가능한 한 ‘스쿨’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대학평가에서 항상 으뜸을 차지하는 프린스턴대학에는 그 흔한 의과대·경영대·법과대·공과대가 없다. 철저히 칼리지만으로서 대학을 운영한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에서 아이비리그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문학 교육만을 위해 설립된 작은 규모의 대학들, 예를 들어 앰허스트 대학, 윌리엄스 대학에도 문리과 대학밖에 없다. 당연히 학생들은 인문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요즈음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는 마이클 샌드 교수의 정치철학 과목이라고 한다.

7000명도 안 되는 하버드 대학 학부생 중에서 800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이 수강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 치밀한 분석력, 총체적 통찰력만이 진정한 경쟁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과는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는다고 폐과하고, 상식적 지식의 총합일 수 있는 경영학과는 마구 키우는 우리의 대학 풍토와는 대조적이다.

애플컴퓨터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플라톤과 호머로부터 시작돼 카프카에 이르는 대학의 고전 독서 프로그램이 오늘날 애플컴퓨터를 만든 결정적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대학 다닐 때 동양철학에 심취했을 뿐 아니라 매킨토시 컴퓨터와 아이팟 디자인 감각은 대학 시절 서예 강좌에서 배운 것이라고 실토했다.

또 휼렛 패커드 CEO를 지냈던 미국 최고의 여성 경영인 칼리 피오리나도 모교인 스탠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학부 시절 전공인 사학을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그룹 김승유 회장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학이 기업 수급형 인재 공급에 광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을 보라! 학부에는 문과대와 이과대밖에 없다. 대학 학부생 전원이 문리과 대학에서 기초과학의 훈련만 받는다. 나머지 경영대니 법대니 하는 것은 모두 대학원 수준의 프로페셔널 스쿨, 즉 직업학교의 몫이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업용의 지식은 각 기업에서 교육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2007년 12월 31일자).

이제 입시철이다.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까 고민할 것이다. 24년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경험에 비춰볼 때 젊을 때는 역시 기초체력을 다지는 게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는 길로 본다. 그래서 기초학문인 인문학을 권하고 싶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긴 여정이기에 기초학문을 하면서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 낫지 응용학문으로 처음부터 굳이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인문학은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하기에 꿈을 크게 지닌 젊은이라면 한번쯤 도전할 만하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