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아이템/앵클부츠]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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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이드 소재의 앵클부츠. 조르조 브라토(Giorgio Brato) 제품.

며칠 전 신호등을 기다리다 제 구두를 내려다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느새 발등이 갈라져 속살이 보이려 하더군요. 지난 5년 동안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함께했던 앵클부츠와 이별할 시간이 된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맑은 날보다 구두 굽이 몇 백배 빨리 닳는다는 비오는 날에는 곱게 신발장에 보관해 둘 걸, 끈적거리고 많은 사람의 발에 밟히기 쉬운 클럽 같은 공간에서는 되도록 자제할 걸….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연습용 샌드백처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구두약을 발라주며 관리를 잘 해줬다면 이 앵클부츠와의 인연이 좀 더 길었을 거라고 후회도 했습니다. 제가 진짜 이 앵클부츠를 사랑했거든요. 그런데 너무 가깝게 있다 보니 소홀했고, 결국 이렇게 복수를 당하는군요.

신발이 발에 꼭 맞아 편하고 멋진 모습으로 보이기도, 장시간 걸어도 그 신발에 싫증 나지 않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나 관계와 비슷하죠.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해도 불편한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적응되면 정이 들어 좋은 관계가 되고, 사랑도 하고 많은 추억을 함께한 뒤 이별하게 되는 과정 말입니다.

‘오늘의 운세’나 ‘별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구절 중 하나인 ‘당신 주변의 가까운 곳’이 생각나 신발장 문을 열어봤습니다. 지난여름 세일 기간에 사서 두어 번 신고 까맣게 잊고 있던 검정 스웨이드 소재의 앵클부츠가 눈에 띄었습니다. 거의 새것이지만 몇 달은 신고 다닌 듯한 독특한 표면 처리와 신을수록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부츠가 신발장 안에 있을 줄이야! 발등이 둥글고 발가락 사이가 우산살처럼 벌어진 제 발에 양말처럼 잘 맞는 착한 앵클부츠가 말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옷장이나 신발장 안을 뒤져 보세요. 잊고 지냈던 매력 덩어리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가슴 설레는 새로운 인연을 연결해 줄 행운의 부적을 찾을지도 모르죠.

하상백 (패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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