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개혁 이데올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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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얼마 전 주변사람에게“무엇에 홀린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측근.장관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것을 보고는“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어.결국 내가 사람을 잘못 쓴거야”라는 독백을 했다고도 한다.그는“내가 돈을

안 받고,매일 칼국수를 먹으며 솔선수범하면 모든 공직자들도 따라 줄 것으로 믿었다”는 얘기도 했다.그는 사과담화에서 이러한 실망을“농락을 당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金대통령은 담화에서 지난 4년의 개혁이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이에 대한 자찬(自讚)이 담화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개혁을 이렇게 성공시켰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고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그렇다면 그렇게 성공한 개혁 속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명분위주면 겉돌게 마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잘못 됐을 때 두 방식으로 접근한다.하나는 누가 잘못을 저질렀느냐며 잘못된'누구'를 찾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면서 잘못된'무엇'을 찾는 것이다.金대통령 마음은 지금 잘못한'누구'를 향한 원망에

차 있는 것 같다.검찰수사는 현철(賢哲)씨가 바로 그'누구'가 아닌 점을 증명하는데 집중됐다.앞으로 있을 국회청문회에서도 이'누구'를 찾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러나'누구'를 찾았다고 한보가 삼킨 5조원을 되찾을 수 없고 또 다시 그러한 실세(實勢)가 출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바로 몇 년 전 한보회장은 이번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그렇다고 이번 사건을 덮어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누구'를 찾아내는데만 골몰했다가 안 되면 결국은 권력의 음모로 결론을 내고 넘어갈 것이다.그래서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잘못을 사람에서 찾는다면 너무나 단선(單線)적이다.사람은 이 시절이나 5,6공이나 비슷할 수밖에 없다.문민정부라하여 특별히 도덕적인 인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그런 점에서 우리는'누가'가 아니고'무엇'이 잘못됐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민주계의 한 정치인은 이런 얘기를 했다.“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는다지만 우리는 돈 없이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우리 사정을 너무

모른다.”정치개혁을 한다면서 선거법을 고쳤다.평균 8천만원 이상을

못쓰게 만들었다.그러나 의원들은 한보라는 한 기업으로부터 5천만원을 떡값으로 받으니 씀씀이가 짐작간다.

개혁은 개혁이고 당선을 위해서는 돈을 계속 써야 한다.공무원

재산공개제는 실시됐으나 공직자 비리는 줄지 않고 있다.경제정의를

내걸고 실시한 금융실명제가 겉돌아 경제에 주름살만 깊게 한다는 원성이

높다.

사실 사람은 믿을게 못되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방향은

옳았다.그러나 그 개혁이 앞의 예와 같이 한결같이 현실을 고려치 않은

명분위주였다.그것이 얼마나 우리 풍토에 부합하며 과연 뿌리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정부의 개혁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책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

개혁에 대해 문제점이라도 얘기하면 단번에 수구(守舊)세력으로

몰아붙였다.공산주의자들이 유토피아를 내세우며 일체의 이견을 용납하지

않았듯이 개혁이라는 이념에 모두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현실적 프로그램 가져야

그래서 문민독재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민주와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국회날치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패는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

결과는 어떤가.이 정부가 그렇게 개혁을 부르짖지만 않았어도 국민의

실망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복잡하고 다원적인 사회가 결코

이념이나 청사진 하나로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개혁 역시

마찬가지다.공산주의의 실패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개혁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이념으로서의 개혁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는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개혁이 되어야 한다.1억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3천만원을 상납하는 세상은 그대로 두고 개혁이라는 명분

하나로 국민을 휘두르

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남은 1년 金대통령은 개혁을 이데올로기에서

현실로 끌어내리는 현실화 작업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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