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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의 묘미를 아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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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주한미군 3600명이 이라크로 간다. 사정을 들어보면 그럴 만도 하다. 미국은 지상군이 모자라 이라크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걸 보충해야 할 화급한 처지다. 기동성과 대응력이 뛰어난 부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네 최정예 2사단 일부를 보낸다는 데 어쩔 것인가.

이라크 차출은 주한미군 감축이다. 세상 이치로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북한 핵문제를 놓고 양국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다. 한국에선 반미는 영화나 TV의 장기간 인기 상품이다. 미국도 이제 반한의 분위기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형편이 이러니 동맹의 모양새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주한미군 감축은 동북아 정세의 대변화다. 변화에는 손해보는 쪽, 덕보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북한은 미군 감소를 환영한다. 그러나 주한미군을 어디든지 보내겠다는 새로운 방침에 반발한다. 부담없이 변화를 즐길 수 있는 쪽은 일본이다.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 전략의 중심축으로 삼으려 한다. 지난 50년간 미국은 한국.일본을 잇는 3각 동맹으로 이곳의 전략을 짰다. 3각 동맹이 허술해졌으니 이제 미.일동맹에 비중을 두겠다는 것이다.

일본 지도자들은 동맹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한다. 한 세기 전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러.일전쟁 때 동맹은 진가를 발휘했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무너진 배후엔 영.일동맹이 있다. 99년 전 오늘은 세계 해전사의 기념비적 날이다.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의 연합함대는 8개월의 장기 항해 끝에 대한해협에 들어온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발틱함대가 지구 반바퀴를 도는 동안 영국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쉬어갈 항구를 찾거나 연료 공급을 받는 게 힘들었다. 피곤에 찌든 러시아 함대는 기다리던 일본에 꼼짝없이 당했다.

당시 영국은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세계 최강이다. 그런데도 동맹을 추구했다. 그 시절 일본은 자주를 부르짖었다. 그런데도 최상의 동맹을 찾아다녔다. 자주와 동맹은 반대말이 아니다. 자주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글사전에서 동맹과 자주는 대칭적이다. 그러나 역사의 사전은 동맹과 자주가 상호보완적이다. 2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게 세계사의 수많은 경험이다. 지금의 한국에서 자주 민족파를 자칭하는 세력들은 상상하기 힘든 역사의 묘미다. 역사에 무지하고 폐쇄적 사고방식으론 이해할 수 없다.

한 세기 뒤에도 일본은 동맹의 효과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안간힘이다. 미.일동맹 아래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경제를 더욱 키우려 한다. 북한 핵으로 한반도 정세가 혼미한 틈을 타 군사대국으로 재등장한 일본이다. 그 배경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미국의 장기 계획은 중국 포위다. 한.미동맹이 시원치 않으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중국 포위망을 다시 짤 태세다. 따라서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은 한.미동맹을 미.일동맹의 보조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일본은 지난 10년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동맹을 다듬고 있다. 안보에 들어갈 돈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동북아의 전략적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한국에선 반미에 못지않게 반일도 거세다. 반미와 반일의 대안은 중국과 친해지기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국력을 기를 때까지 초강대국 미국과 마찰을 피한다는 게 중국의 확고한 방침이다. 우리에겐 동북아 질서의 변화를 감당할 외교.군사력이 떨어진다. 역사의 지혜와 경험을 등한히 하면 쓰라린 대가를 치른다.

박보균 정치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