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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5년만에 새 시집 '이 짧은…' 낸 정호승 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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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정호승씨는 ‘시 읽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시인 정호승(54)씨가 여덟번째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을 펴냈다. 1999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후 5년 만이다. 시집에 담긴 74편 중 49편은 문예지 등에 발표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씨는 "메모는 꾸준히 했지만 시로 써내지는 못했다. 시를 한동안 접어도 언제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러다 시가 나를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49편은 그런 절박감에 사로잡힌 정씨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A4지 100쪽 분량의 메모를 집중적으로 시로 정리한 것들"이다. 정씨는 "시는 어차피 순간의 불꽃 같은 것 아닌가. 내 경우 틈틈이 쓰는 것보다 한꺼번에 쓰는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집을 펼치면 첫번째 시 '시인'부터 눈길을 붙잡는다. 시인은 겨울 아침 "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 고무함지 속에서 얼어죽은 미꾸라지를 본다. 기역자나 이응자 형상으로 얼어붙은 미꾸라지들이 오히려 시인 눈에는 "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시인들"로 보인다.

'겨울 한강'에서는 초겨울 한강 시민공원에서 축구시합을 하는 노숙자들을, 이리저리 차이다 강물 위에 떨어지고 마는 축구공에 빗댔다.

이전 시집들과 비교해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정씨는 "내 시가 알 굵은 깍두기, 작은 깍두기로 변해왔다면 이번 시집의 시들은 똑같은 무로 만들었지만 좀 더 잘게 썬 무채라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시의 행과 행 사이에 강물이 흐르는데, 강폭을 좁히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물이 촘촘해졌으니 시인의 강에서는 더 섬세한 것도 많이 낚였을 것이다. '이사'는 아파트를 철거하는 와중에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이삿짐 트럭에 실려나가자 까치들이 그 나무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담았다.

정씨는 "처음엔 시집 제목을 '나의 수미산' 중 한 구절인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새 한마리'로 하려고 했었다"고 밝혔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은 원래 꽃처럼 아름답다. '불면'에서 시인은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는 건/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꽃이 있는 까닭이다"라고 노래한다.

문제는 언제부턴가 인간의 마음 속에 짐승이 한마리씩 들어앉게 됐다는 점이다.

서울역에서는 노숙자들이 라면 박스를 깔고 잠들고, 한 중학생 소년은 엄마의 시신과 함께 몇달을 보냈는가 하면, 경기도 모텔의 좌변기에는 갓난아기가 버려져 있다.('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그러나 그런 현실과의 싸움에서 시인은 예전처럼 무모하지 않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벽'중) 어쨌든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것이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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