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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잠 깨어난 일본] 3. 공장, 더 이상 안 떠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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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도쿄의 구로공단' 격인 오타구(區)를 2년 만에 다시 찾았다. 2002년 4월 당시 '도산의 거리'로 불리던 이곳에도 봄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해 가을부터 경기가 나아졌다. 지난해 말에는 너무 바빠서 주문을 사양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한동안 이런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오타구산업진흥회 야마다 노부아키 전무)

"중국으로, 중국으로 나가던 큰 기업들이 국내 생산을 늘리면서 금형 주문이 불어나고 있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1000여개의 금형업체가 쓰러졌고, 살아남은 기업들은 이제 경기가 회복되는 덕을 보고 있다. "(나미키 마사오 나미키금형 사장)

나미키금형의 지난해 매출은 6억2000만엔으로 2년 전보다 30% 증가했다. 이 회사는 요즘 레이저를 이용해 철을 깎아내면서 금형 틀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그렇다고 오타구 지역의 마치코바(町工場, 소규모 공장)가 도산의 고리를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다. 2000년에 3000여개였던 도산 건수가 해마다 10%씩 줄어들긴 해도 근근이 연명하는 중소업체들이 여전하다.

오타구와 함께 대표적인 '모노즈쿠리마치(モノづくり 街=제조의 거리)인 히가시오사카. 10년 불황 속 2000여 중소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중국으로 옮겼던 이곳도 활력을 찾고 있다. 2001년 이곳 중소기업인들이 2005년까지 우주선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대학과 정부기관이 거들었다. 이처럼 기업과 연구기관.대학.지자체가 함께 힘을 모으는 산업 네트워크인 클러스터가 전국적으로 19개다.

하가시오사카 시청 바로 옆에 중소기업의 신제품을 전시하고 구매자와의 상담을 주선하는 크리에이션 코어 히가시오사카가 있다. 애완동물을 위한 납골당부터 식사한 뒤 버려도 되는 친환경적인 종이 도시락통, 태양전지와 레이저로 움직이는 고속도로 표지판, 절대로 풀리지 않는 볼트 등 200여개 제품이 진열돼 있다.

오사카 히라노구(區)에서 도금업을 하던 한 중소업체는 나노 단위로 가공 처리해 금속의 강도를 10배 이상 높이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도금작업은 하지 않고 로열티만 받는 첨단업체로 거듭났다. 종업원 12명의 밀레니엄 게이트 테크놀로지가 그 주인공으로 지난해 1억엔의 로열티 수입을 올렸다. 영업은 스미토모상사를 통해서 하는데, 올해 로열티 수입은 적어도 8억엔을 예상한다. 직원 12명 중 절반이 연구개발직이다.

"20년 전 가업을 이어받아 해오다가 다들 중국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1999년 연구개발 회사로 거듭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도금이나 하는 업체니까…'라고 생각했다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 "(다케우치 이사무 사장)

일본에는 이처럼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이 많다. 꾸준히 연구개발 투자를 하고 변신을 거듭한다. 바로 이런 기업들 덕분에 300여개(2001년 기준 318개)의 세계 일류 상품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활용하기 나름이다. 확실한 기술만 있으면 중국도 문제 없다. "

캐논과 리코.세이코엡슨 등 일본 정밀기계 업계가 내린 결론이다. 이들 업체는 중국에서 제품을 만들면서도 한편으론 국내 제조기술을 단련하기 위해 생산현장을 중시하고 기술력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연구개발과 설계, 생산기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전공정(前工程)'은 일본에서, 단순한 가공.조립과 같은 '후공정'만 중국을 활용하는 전략이다. 그 결과 단순한 양산 거점인 중국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중국 내 제조비용이 그전만큼 싸지 않다. 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직원 파견 비용도 만만찮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나 통화절상을 걱정해야 하고 정치적 위험 부담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에서 만드는 게 안전하다'.

그래서 복사기와 프린터가 주력제품인 리코는 최종 조립은 중국에서 하지만 정밀부품은 국내 제작 비중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캐논도 레이저프린터용 토너카트리지 등에 대한 중심축을 일본으로 옮기고 있다.

지금 일본 곳곳에선 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일본 최대 건설장비 업체인 고마쓰제작소는 유압기 등 핵심 부품을 만드는 고야마 공장의 생산능력을 27% 높이기로 했다. 사카네 마사히로 사장은 "핵심 부문은 기술이전을 할 수 없다. 끝까지 일본에서 만들어라"고 지시했다.

공장 건설 붐은 지난해 시작됐다. 내수용 공작기계 수주액이 두자릿수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계속되는 중국 특수와 불티나게 팔리는 디지털 제품이 공장 증설을 이끈다. 반도체 메이커 NEC는 600억엔을 들여 야마가타 공장에 200㎜와 300㎜ 실리콘웨이퍼 생산라인을 건설 중이다.

'메이드 인 재팬' 회귀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제조업의 3대 강점-숙련된 기술인력, 낮은 불량률, 저비용 공정-을 활용해 재고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자는 전략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켄우드다. 2002년 MD플레이어 생산기지를 말레이시아에서 야마가타로 옮겼다. 이직률이 높은 말레이시아 근로자와 달리 일본에선 한 직장에 오래 머물며 여러 일을 소화한다. 말레이시아 근로자가 공정 하나를 처리하는 시간에 야마가타 근로자들은 4~5단계를 거뜬히 해냈다. 말레이시아에서 22명이 하던 일을 야마가타 공장에선 4명이 처리한다. 켄우드는 일본으로 돌아온 뒤 공장 면적을 70% 줄였고, 불량률은 80%를 낮췄다.

"산업공동화는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다. 이제 싼 물건을 많이 만드는 것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일본 기업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와키모토 신야 중소기업청 과장)

도쿄.오사카.나고야 = 특별취재팀
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기자,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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