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드라마 小史] '거부실록'이 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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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드라마는 '잘해야 본전'이다. 해당 기업인의 좋은 점을 부각하면 미화하는 것 아니냐며 눈총을 받고, 좀 부정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득달같이 기업 관계자가 항의하거나 심지어 내용을 고쳐달라며 '압력'을 넣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기업 드라마가 많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이 분야의 '원조'로는 MBC의 '거부실록'(1982년)이 꼽힌다. 이승훈.김갑순.최봉준.이용익 등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엄청난 재산을 모은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뤘다. '공주갑부 김갑순'편에서 주인공이 툭하면 내뱉은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야'라는 뜻)라는 일본말이 5공화국 초기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1983년 MBC '야망의 25시'는 정경유착의 현실을 정면에서 고발하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작가가 한때 대본 집필을 거부하는 등 곡절을 겪더니 결국 22회만에 중도 하차해 구구한 억측을 낳았다. 당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실제 기업인들과 비슷해 외부 압력에 상당히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88년에는 제세그룹 창업자 이창우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훠어이 훠어이'(KBS)란 드라마도 있었다. 이 드라마의 작가가 바로 이번에 '영웅시대'를 맡은 이환경씨다.

1991년 KBS의 '야망의 세월'은 현대가(家)를 다루면서 관계자들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이유로 물의가 일었다. 방송위원회가 두 차례나 '주의'를 주고 '시청자에 대한 사과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등장인물과 기업을 미화하고 영웅적으로 묘사해 결과적으로 특정 기업과 인물을 편향적으로 홍보, 방송의 공공성을 위배했다"는 이유였다.

이후에는 실존인물이나 기업을 다룬 드라마가 거의 없었다. 제과업체의 여성 창업자를 다룬 '국희'(1999년.MBC)나 일제시대 은행가를 무대로 삼은 '황금시대'(2000년.MBC)가 있었지만 모두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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