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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시행 3년6개월을 맞고 있는 금융실명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차명(借名)계좌다.남의 이름을 빌리는 합의 차명을 적발해낼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때 기업인들이 노태우(盧泰愚)씨에게 이름을 빌려준 사실이 드러났었다.지난해 가을에는 은행들이 거액 자금 유치를 위해 차명 알선을 관행처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금융실명제의 실명(失名)위기론이 나오

기도 했다.

차명계좌를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올 5월에 첫 신고를 받는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제대로 시행돼야 한다.남에게 이름을 빌려줬다가 금융소득이 늘어 국세청에 통보되고,세금을 많이 무는 일이 생기면 이름을 잘 빌려주지 않게 될 것이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금융실명제의 완결판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그동안 재정경제원 금융실명제실시단은“현재 4천만원인 금융소득 종합과세의 기준금액을 더 낮추고,차명을 이용한 범죄를 엄중 처벌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차명 관행

을 없애나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금융소득 종합과세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후퇴의 길을 걷고 있고,그만큼 차명계좌를 뿌리뽑을 가능성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차명계좌가 활개를 치는 한 금융실명제의 정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차명계좌 처벌규정이 미흡한 것도 차명계좌를 부추기고 있다.현행'실명거래등에 관한 긴급명령'에 따르면 차명거래를 단순히 알선한 금융기관 직원은 5백만원이하의 과태료와 은행감독원의 징계가 처벌의 전부다.또 차명계좌가 범죄에 연루되지

않는한 이름을 빌린 사람이나 빌려준 사람은 처벌되지 않고 있다.

선의의 경우를 제외하고,금융실명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차명계좌를 적발해내는 감독당국의 노력도 절실하다.그러나 원천적으로 차명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역시 종합과세의 정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부로서는 명분상 무기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에 차명을 막는 종합과세쪽만 후퇴를 거듭해 온 셈이다.명분에 매달릴게 아니라 차라리 무기명을 제한적으로 터주고,차명을 막아주는 종합과세를 정착

시켜 나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정책일 수도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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