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벌>12.덩샤오필家-등소평 후광 사라진 중국 제일太子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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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일가를 부르던 말이 있다.'중국제일가족(中國第一家族)'.그 가문에 암운(暗雲)이 드리우고 있다.인구 12억 중국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했던 부친 덩샤오핑의 사망은 그의 자녀 5명에게는'보호막'의 제거를 의미한

다.부친의 위광(威光)아래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을 쌓으며'중국제일태자(中國第一太子)'로 불리던 鄧의 자녀들은 이제'끈 떨어진 연'신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덩샤오핑의 권력기반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일반 중국인들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됐던 사람은 장남 덩푸팡(鄧樸方)이었다.덩푸팡의 대외적인 활동은 크게 두가지.첫째는 중국장애인협회 활동,둘째는'캉화(康華)'그룹 경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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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당시 홍위병(紅衛兵)의 비판을 못 참아 자살을 기도하다 장애인이 된 덩푸팡은 전국 장애인협회를 맡아 장애인들의 복리증진에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무리한 활동으로 각 지방정부와 각급 기관장들의 심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덩푸팡이 고위층 자녀들로 구성된 이른바'태자당'을 대거 취합해 87년 창립한'캉화'그룹은 겉으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상업기관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권부(權府)로 통했다.캉화그룹은 특혜성 우대조치로 급성장했다. 특히 국내

생산물자들의 우선 구입권을 인정받아 독점적으로 홍콩 등지에 내다 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이 그룹에서 운영하는 택시의 운전기사들조차 교통법규 위반으로 걸리게 되면'캉화'라는 한마디로 경찰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덩샤오핑의 자녀중 외형상 부친을 가장 닮았다는 장녀 덩린(鄧林)의 공식 신분은 화가(畵家)다.중국화를 그리는 그녀의 작품은 엄청난 고가(高價)에 팔렸다.특히 중국대륙에서 한몫 잡으려는 홍콩.대만 기업인들에게는 가장 인기있는 소장품

이었다.작품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 최고실력자에게 줄을 대기 위한 상인들의 치열한 몸부림이 값을 올렸다. 덩린의 남편 우젠창(吳建常)은 벼락출세의 표본이다.공장의 하급노동자에서'세단뛰기'를 거듭,재계의 실력자로 서는데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그의 현직은 중

국유색(有色)금속총공사 사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요 취급품목은 황금일 것이라는게 많은 사람들의 추측이다.그는 93년 홍콩에 진출,역시 대륙을 꿈꾸고 있는 홍콩 최대재벌 리카싱(李嘉誠)과 손잡음으로써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3녀 덩룽(鄧榕)은 기력이 쇠퇴하면서 어눌해진 부친의 입과 귀 역할을 하며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그녀는 이를 이용해 한때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면서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그녀의 치부(致富)는 남편

허핑(賀平)을 통해 이루어졌다. 해방군 현역 소장인 허핑은 대외 무기거래를 관장하고 있다.허핑 또한 95년에 홍콩 재벌그룹 신훙지(新鴻基)와 제휴,이 회사 부주석직에 올랐다.덩룽과 허핑의 주요 자산은 부동산이다.이들은 현재 선전(

深수) 등지에서 2개의 부동산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재산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장남 덩푸팡의 캉화그룹이 80년대를 장식했다면 90년대는 단연 막내 덩즈팡(鄧質方)의 시대였다.형제중에 대외적인 활동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덩즈팡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87년 이후 일반 사무원으로 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에서 일했

다. 그러나 그도 권부와 재계로부터 밀려드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그는 태자당 특유의'관시(關係)'를 최대한 활용,부동산과 주식투자등에 손을 대 막대한 부를 구축한뒤 현재 쓰팡(四方)공사를 운영하고 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에 가까웠던 덩샤오핑 자녀들의 이같은 활약은 중국 권력층을 비롯,일반 민간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베이징(北京) 당국도 이들의 지나친 행동을 견제하기 위해 鄧 생시에도 경고성 조치를 취했다.

덩샤오핑이 사망한 지금 그 자녀들의 전력(前歷)은 그들의 운명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뇌관이 되고 있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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