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의혹만 구체화한 한보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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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일 발표된 검찰의 한보수사 결과는 예상했던대로 그동안 제기된 의혹을 충분히 풀지 못했다.한보철강 부도사태후 국민들은'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막연한 의혹을 갖고 검찰의 수사를 지켜봐 왔다.그같은 의혹은 수사과정을 통해'아하,한

보사태의 의혹은 이런저런 점이고 그 내용은 이럴 것이다'는 식으로 구체화됐다.하지만 24일만에 일단락된 수사결과는 각종 의혹에 관련된 당사자들의 해명을 취합한 정도에 지나지 않아 국민들의 의혹을 해소하기는 어렵다.검찰수사가 궁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그것을 증폭시키고 구체화했으니 실망스럽고 답답한 일이다.

한보사태의 핵심은 5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어떻게 한보로 흘러들어갔으며 그 과정에 어떤 힘이 작용했느냐 하는 것이다.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검찰은 이에 대해'한보측이 뇌물로 몇몇 은행장들을 매수했으며 그 과정에 일부 여권실세

가 돈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이를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8명의 정치인과 은행장등에게 32억5천만원을 주고 5조원의 특혜를 받았을 뿐이라니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의 뛰어난(?) 로비능력을 인정한다고 하

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은 각종 의혹중 거액대출의 배경에 대해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산업기술정책 방향에 따라 한보철강이 기간산업체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무리하게 여신규모가 커진데 대해서는 홍인길(洪仁吉)의원의 청탁

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이와함께 한보철강의 인허가에 대해서는 새로운 제철기술의 도입필요라는 정부방침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발표했다.한보대출의 절차에 별 문제가 없으며 뒤늦게 여신규모가 비정상적으로 커지자 은행측

이 한보경영주가 스스로 자금조달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鄭총회장에게 경영권포기를 종용했으나 거절해 부도처리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한보사건은 그 규모와 내용으로 볼 때 조직성이 엿보이는 비리라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은행.관계부처.정치권의 협조없이는 담보능력 등을 무시한채 한 기업에 그만한 돈을

수년간 퍼붓기는 어려운 일이다.단순히 은행로비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문제는 훨씬 빨리 노출됐을 것이다.이같은 사건의 성격 때문에 일찌감치 각 연결고리의 비리가능성에 의혹이 제기됐고,정치권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검찰의 수사결과에는 아예 정치권 배후의혹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검찰의 수사결과대로라면 정치권 비리관련자의 중심인물은 洪의원이다.검찰은 洪의원이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있던 95년 1월에도 한보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이는 한보비리의 조직성이 엿보이는 단서지만 검찰은 정

치권의 역할을 한보의 정상적 은행대출과정에'기생'한 부정부패로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검찰의 한보수사는 제기된 의혹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축소수사.짜맞추기수사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수사 착수단계에서부터 검찰의 체질에 대한 지적이 있긴 했지만 검찰은 권력형 비리에 또 한번 한계를 드러내고 말

았다.검찰은 한보측이 중요한 회계장부를 파기하고 금품수수가 현금으로 이뤄지는 등 수사의 상당부분이 鄭총회장의 진술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수사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지만 애초에 의지가 없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거액 정치자금에 대한 처리에 소극적인 점 등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보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일단락됐지만 의혹은 여전히 살아있다.곧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이뤄진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험상 그 진상을 밝히는데는 역시 한계가 있을 것이다.국민들의 좌절과 불신은 이 상태에서는 회복되기 어려운 분위기다

.수많은 의혹이 얽힌 사건을 24일만에 마무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무리다.이대로 덮어서는 안된다.한보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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