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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외국인이 믿지 않는 게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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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선 외교 및 대외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요 대상국 지도자들의 문제인식구조를 정확히 파악, 맞출 필요가 있다. 세계 경제의 축을 이루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람들은 문제를 인식하는 메커니즘이 서로 다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각각 대표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특기할 만한 것은 지도자들의 교육 내지는 훈련 과정이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 의원 상당수가 변호사 출신이거나 유사한 훈련을 받았다. 중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공학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후진타오 주석이나 원자바오 총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핵심 당원이 공학도 출신이다. 공학도들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고 변호사나 법학도들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다. 공학도들에겐 수단보다는 결과가 중요하지만 변호사들은 같은 결과라 하더라도 어떤 과정을 밟았는가에 따라서 결과의 중요성과 의미가 달라진다.

창조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외교·경제 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국은 변호사 코드로, 중국은 엔지니어 코드로 대하는 것이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자동차산업의 양국 간 불균형적인 무역관계로 인해 자유무역협정(FTA)이 의회 비준을 받느니 못 받느니, 우리가 먼저 FTA를 비준해야 되느니 마느니 하는 등 미국의 변화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러나 오바마의 출신주인 일리노이주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필자가 아는 오바마는 얼마만큼의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 FTA 협약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과의 FTA 협정은 조그만 선거전략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한국시장이 미국의 자동차산업 회생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고, 미국 자동차산업 위기가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자동차 주요 생산국과의 무역 불균형 때문도 아니고, 미국인들까지 미국산 자동차를 외면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오바마는 누구보다 잘 안다. 미국 자동차산업 위기는 스스로의 잘못이란 사실을 변호사 출신인 오바마를 비롯하여 주요 상하원 의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닥에 떨어진 한국의 대외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 창조적 실용주의의 전제조건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파이낸셜 타임스라든지 외국 평가기관이나 투자자들이 한국 신용도를 과소평가하고 위험도를 과대평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선진국의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들은 한 나라의 경제규모가 옛날보다 커졌다고 내용물의 변천 과정을 무시하고 무조건 호평하지는 않는다. 불안한 노조 문제, 원칙 없는 규제, 갈팡질팡하는 부동산 정책 등 외국 투자자들 눈에 한국의 경제환경을 의심케 하는 요소는 산적해 있다.

 투자자들은 돈이 되는 곳이면 투자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한국은행 총재가 이자율을 어찌 한다 해도 시장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상황을 장황하게 보고해도 믿는 사람이 없고, 이제는 대통령이 뭐라 해도 소 귀에 경 읽기가 되어버릴 정도로 국내인들이 믿어주지 않는데 외부 기관이 한국을 믿어주겠는가?

20년 전 서울 올림픽 직후 한국 주가지수가 처음으로 1000을 넘어섰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2007년 국내총생산(GDP)이 1987년의 7배가량 되는데 주가지수는 같은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한국시장이 저평가돼 있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경제이론을 적용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국내 지도자들이 한국시장이 저평가돼 있고 미래가 밝으니 투자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외국사람들이 믿지 않는 데 있다. 신용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떨어진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신용을 높이는 길이 진정한 ‘창조적 실용주의’의 첫걸음이다.

박헌영 이화여대 교수, 경영대학장 겸 경영전문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