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황장엽비서의 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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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체제붕괴 가능성을 극구 부정해온 한 재미(在美) 북한전문가는 북한체제의 붕괴가 얼마나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인가를 강조하면서“만일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한다면 몰라도…”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그러니까 黃비서같은 사람이 남한으로 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黃비서가 남한으로 망명을 요청해 왔다.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사실로 돼버린 것이다.黃비서라는 존재는 북한의 다른 고위 당관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그는 김일성.김정일 권력구조의 사상적 기저를 제공해온 북한의 제1 이론가다. 사회주의는 이론을 중시한다.사회주의운동은 기존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이론운동일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북한체제에서 黃비서가 차지하는 상징성과 비중은 남한사회의 기준을 가지고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정도다.

그런 그의 망명결정 동기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추측만 무성하다.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은 지금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왜냐하면 黃비서의 망명은 북한체제의 이념적 위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89년 가을 동유럽공산국가들이 낙엽처럼 몰락했을 때 유럽의 어떤 통찰력있는 지성인은 사회주의 종언의 원인으로 사회주의 비전에 대한'믿음의 상실'을 제시했다.사회주의체제는 단순히 경제적 실패 때문에,또는 식량과 소비재가 부족해 몰락한 것이 아니다.소련 공산주의는 과거에 경제가 몇곱절 더 어렵고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붕괴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공산독재가 사회주의운동 초기의 이상주의를 포기하고 기득권 세력의 이익만을 보호하는 탄압과 착취의 체제로 굳어버림으로써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비전을 불신하게 되었고 인민대중은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만을 느끼게 되었다.체제의 몰락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북한은 이미 몰락한 사회주의체제들이 간 길을 다만 좀 뒤늦게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黃비서가 망명까지 결심하게 만든 오늘의 북한

상황은 북한사회내의 다른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마음속으로 깊은 고뇌와

번민,불만과 저항을 느끼게 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우선 우리는 黃비서의

망명사건을 그의 고뇌와 번민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대해야 할 줄

안다.그의 망명을 저속한 멜로물처럼 다룬다든지,또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黃비서가 고민하는 민족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들의 생각이 다른 때에는 우리들의 생각을 분명히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그가 생각하는 주체사상이 김일성.김정일에 의해 왜곡된

것이 문제인지,아니면 주체사상 자체에 문제가 있었는지 진지하게 대화해

볼만하다.그렇게 하기 위해선 黃비서가 원하는대로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중국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은 黃비서 망명 문제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좀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黃비서를 본인이 희망하는대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동의해 주는 것이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현명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다만 여기에서 한국정부는 중국의 입장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원래 한국의 외교스타일은

조용하고 세련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이번에는

우리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의식하고 중국정부와 조용히,그리고 침착하게

대화를 진행하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黃비서의 망명사건을 국내정치나 대북(對北)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는데 달려 있다.특히

한보사건으로 조성된 정권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黃비서의 망명을

이용하려 한다면 오히려 한보사태의 처리도 그르치고 그의 한국행 문제도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黃비서의 망명은 한반도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대응도 신중하고 사려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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