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고이즈미 정상회담] "납치엔 진전…국교정상화 속단은 일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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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右)가 22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평양 AP=연합]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다시 만났다. 본사 김영희(金永熙)대기자가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 이종원(李鍾元) 릿쿄(立敎)대 교수, 이즈미 하지메(伊豆見元) 시즈오카(靜岡)현립대 교수와 삼각 국제 전화대담을 하고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를 들어봤다.

▶김영희=고이즈미 총리가 납치자 가족 5명을 데려온 것은 상당한 성과인데 일본 국내 반응은 냉랭해 보입니다.

▶이즈미=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에 남은 8명 중 5명만 돌아온 것도 부분적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납치 문제는 평가받을 만하다고 봐요. 특히 金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를 '미결상태'라고 표현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에요. 그동안 북한은 납치 문제는 '완전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어요. 그런데 金위원장은 이번에는 '백지화'라는 표현을 썼어요. 이것은 납치 문제가 미결상태임을 인정하는 표현이죠.

▶이종원=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필요 이상으로 높았던 게 사실이에요.

▶金=이번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성과가 앞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 교섭에 결정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십니까.

▶이즈미=아직 그렇게 말하기는 힘듭니다.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만 이것이 국교정상화 교섭으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합니다. 납치 문제의 종결 여부도 최소 일주일 정도 여론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李=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에서 돌아와 행방불명자 가족을 만난 자리에서 "국교정상화는 내 책임이다. 양국 관계를 적대관계에서 우호관계로, 대립에서 화해협력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장면이었어요. 앞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큰 그림'이 한두 달 안에 나와야 합니다. 아니면 고이즈미는 거센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어요.

▶金=고이즈미 총리는 조총련의 대북 송금과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 제한 등 대북 경제제재를 발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에게 그런 약속을 지킬 정치적 힘이 있습니까.

▶이즈미=그 약속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2002년 평양선언을 지켜야 하는 거죠. 북한이 양국 평화관계를 규정한 평양선언을 위반하면 제재에 나설 수도 있다는 의미죠. 제 생각으론 평양선언 위반에 대한 해석권은 일본 측이 갖고 있습니다.

▶李=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金위원장에게 정치적으로 힘든 약속을 한 것 같습니다.

▶金=한국 입장에서 보면 고이즈미의 방북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납치 문제에만 치중하고 핵과 미사일 문제는 소홀하게 다뤄졌다는 인상입니다.

▶이즈미=일본 국내 정치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 문제의 70~80%가 납치 문제였어요.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도 납치 문제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2002년 9월에 양국이 채택한 평양선언이 북.일 관계 정상화와 함께 '안보협의'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일본은 관계 정상화와 함께 북한과 핵.미사일 문제를 다룰 안보협의를 투 트랙(two track)으로 병행해 진행시키고자 해요. 고이즈미 총리가 金위원장과 이번에 안보협의 문제를 논의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번 회담에서 거기까지 나갔다면 꽤 성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죠.

▶李=이번에 핵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된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북한으로선 고이즈미 총리를 밀어줄 필요가 있어요. 왜냐면 주변국 지도자 중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에 가장 적극적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정상회담도 북한의 '고이즈미 밀어주기'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金=金위원장은 미사일 시험발사 모라토리엄(동결)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까.

▶이즈미=없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나 이번에는 통상적 모라토리엄에 그쳤습니다. 큰 의미 부여는 힘들 것 같습니다.

▶李=평양선언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거론했다고 봐요. 앞으로 북.일 간에 안보협의가 재개되면 거기서 논의될 겁니다.

▶金=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북한 경제의 숨통을 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준의 대북 지원을 하지 말라는 사실상의 압력을 넣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식량 25만t과 1000만달러(약 120억원) 상당의 의약품 지원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즈미=일본의 지원은 어디까지나 유엔을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에 국한됩니다. 따라서 미국도 큰 불만이 없을 겁니다.

▶金=그동안 북한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강경, 한국은 유화적 입장을 취해왔어요. 이제 대북 공조체제의 균형이 깨진 겁니까.

▶이즈미=총리가 방북했다고 일본이 유화적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는 힘들 겁니다. 특히 핵문제에 대한 일본 입장은 여전히 강경해요. 일본과 미국 사이에 큰 입장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金=金위원장 입장에서 보면 납치자 가족 5명 귀국, 행방불명자 재조사 두 가지를 양보한 대가로 고이즈미로부터 경제제재를 발동하지 않겠다는 것과 식량과 의약품을 얻어냈는데, 외교술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즈미=金위원장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金위원장의 중장기 목표는 북.일 국교수립을 통해 일본의 대규모 경제원조를 받고 북한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입니다. 최종 목표는 북.일 수교를 발판으로 하는 북.미 수교예요.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북한의 갈 길은 아직 멀어요. 특히 일본은 북한과의 모든 회담에서 '포괄적 해결'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포괄적 해결이란 '납치.핵.미사일 문제 등이 모두 해결되기 전에는 북한과 국교 정상화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고이즈미 총리가 金위원장에게 '포괄적 해결'을 거듭 강조했다고 합니다.

▶李=金위원장이 단기적으로 얻어낸 것이 많습니다. 우선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에 와서 金위원장의 체면을 세워줬죠. 또 가족 5명을 돌려보낸 것치고는 북한이 많이 받아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정작 노리는 것은 이를 통해 핵 해결 1단계로 몰고들어가는 것이라고 봐요. 구체적으로는 이번 회담을 통해 소강상태에 있는 핵문제를 동결→보상→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는 북한식 해법 수순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것이지요. 앞으로 한두 달 안에 북.일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어떻게 표면화되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金=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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