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트로이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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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패드라익 콜럼 글, 윌리 포가니 그림
비룡소, 354쪽, 1만원

지금 극장에 가면 잘생긴 미국 배우 브래드 피트가 투구를 쓰고 창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브래드 피트가 그리스 장군 아킬레우스로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노래한 『일리아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지어진 지 3000년이 다 되어가는 한 시인의 노래가 오늘날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여느 시인의 노래가 아니다. 서양 문화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두 기둥 중 하나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전하는 소중한 자료다. 지은이 패드라익 콜럼의 『트로이 전쟁』이 원작으로 삼고 있는 두 이야기 중 하나가 『일리아드』다. 다른 하나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와 함께 앞서 말한 두 이야기는 서구인들 사이에서 꼭 읽어야 할 3대 고전으로 여겨진다. 『일리아드』가 스파르타의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디세이』는 그 전쟁에서 싸웠던 오디세우스 장군이 고국 이타카로 돌아오면서 겪는 고난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시는 고어체로 쓰인데다가 운문 형태라서 어른들도 읽기 어렵다. 게다가 그리스 연합군 우두머리들의 혀 꼬이는 이름들이 일일이 열거되기 시작하면 어린 독자들이 소화불량에 걸리는 건 시간문제다. 『트로이 전쟁』은 바로 이 어려운 두 고전의 2만7803행을 한 권으로 묶어, 차마 어른이 될 때까지 신화 읽기를 미루지 못하는 조바심 많고 호기심 어린 청소년들을 위해 펴낸 고마운 책이다.

따분하고 어려운 서사시를 읽기 쉽게 썼지만 어디에도 허술한 구석은 없다. 콜럼은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을 텔레마코스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재치 있게 연결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전쟁 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러 항해에 나선다. 그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그의 아내이자 트로이아 전쟁의 불씨였던 헬레네로부터 전해 듣는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가 바로 『일리아드』다. 한편 집으로 향하던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표류하던 끝에 떠밀려 닿은 한 왕국에서 그 동안 있었던 고난과 역경을 풀어놓는데 그 이야기가 『오디세이』다.

서술 방식은 바뀌었어도 『트로이 전쟁』은 두 원작에 담긴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나열한다. 예를 들어 브리세이스라는 포로 처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몰아내기 전 아들 텔레마코스와 치밀한 계획을 짰다는 사실도 원전만큼 비중 있게 다루었다. 원작이 무참하게 잘려나가거나 왜곡되었을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수많은 사연들을 짜임새 있게 엮은 이 책은, 어렵지만 이제는 필독 도서가 되어버린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소화하기 쉽게 미리 꼭꼭 씹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옮긴이 정영목의 빈틈없는 번역과 친절한 각주는 원전을 더욱 잘 넘어가게 만든다. 그래서 평소 호메로스를 두려워했던 어른들도 청소년들과 함께 읽어볼 만 하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서구 문학과 예술의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많은 부분이 바로 호메로스를 통해 전해졌고 서구 문학과 예술은 신화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주인공 헬레네의 이름을 보고, 스파르타의 헬레네를 떠올리며, 주인공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점칠 수 있다. 나아가 서구 문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뿌리를 깨우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자부해도 된다. 한국인이자 세계인으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이 책은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다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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