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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존엄사 인정’ 옳은 방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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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존엄사(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한 첫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 서부지법은 어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75·여)씨 가족이 “어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소생 가능성이 없는 치료 행위는 무의미하다”며 “김씨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주문했다.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헌법 10조를 판결 근거로 들었다. ‘행복하게 살 권리’만큼 ‘품위 있게 죽을 권리’도 인정하는 게 헌법을 따르는 길이라는 판단이다.

이번 판결은 현실과 법의 괴리를 메우려는 재판부의 진취적 법 해석이 작용한 것으로 옳은 방향이다. 그동안 안락사를 살인으로 보는 법 해석의 벽에 부닥쳐 김씨와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환자가 본인의 희망과는 관계없이 불필요한 연명 치료 속에 고통을 받아 왔다.

의학적 판단에 근거한 존엄사는 인정돼야 한다. 회생 가능성 없는 환자에게 연명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 물심양면의 고통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중에는 존엄사를 인정하는 나라가 많다. 미국의 경우 40개 주가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도 1955년 요코하마 법원의 판례 이후 용인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적극적 안락사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2000년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 그것이다. 생명 존중에 엄격한 교황청도 1980년 존엄사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하고자 하는 ‘집착적 행위’보다는 생명을 포기하는 게 오히려 윤리적일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존엄사 문제를 공론화할 때가 됐다. 국립암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이 ‘소극적 안락사’에 찬성하지만 자유로운 의사 개진조차 금기시하고 있다. 사회 모든 주체가 참여해 존엄사에 대한 기준과 절차를 토론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당장 이번 판결에 따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 가족들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모든 존엄사 판정을 소송에만 의존하기는 어렵다. 선진국들처럼 ‘사전의사결정제’를 도입해 법원 판결 없이도 안락사를 시행하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생전에 장기 기증을 약속하면 사후에 보호자의 별도 동의 없이 병원이 장기 이식 수술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고통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극약 등을 투여해 목숨을 끊는 적극적 안락사는 용인하면 안 된다. 그것은 엄연한 살인행위로 환자를 도운 이들까지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존엄사가 악용되지 못하도록 사회감시체계를 구축하는 일도 중요하다. 가뜩이나 효와 품앗이 등 전통적 미덕이 사라지고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노인이나 빈곤층이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치료 혜택에서 멀어지는 패륜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