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家閥>10.필리핀 아키노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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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코라손 아키노(64)전 필리핀대통령과 남편인 고(故)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이들의 결합과 운명은 필리핀 최고 명문가의탄생과 비극,그리고 영광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담고 있다. 20년이상 이어진 마르코스 독재와 맞서 싸웠던 베니그노 아키노가 83년 암살당한후 그가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아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86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코라손의 친정인 코후앙코가와 아키노가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북쪽 타를라크주를 양분하고 있는 대지주 집안이었다.또 정치적으로도 노선을 같이해 양가는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아키노가는 본래 정치가 집안이라 할 수 있다.베니그노의 조부인 세르비아노 아키노는 스페인과 미국을 상대로 투쟁한 독립투사며 아버지인 베니그노 아키노 1세는 하원의장과 상원의원을 지낸정치인이었다. 코후앙코가는 타를라크주 최대의 부호 집안이었다.코후앙코 집안은 19세기 필리핀 루손섬에 자리잡은 중국인 이민의 후예로 운수사업과 농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1천8백만여평 크기의 사탕수수밭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이들 가문간의 혼인은 정치적 명망과 풍부한 재력을 결합한 필리핀 최고 명문가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코후앙코가의 8남매중 여섯째인 코라손 코후앙코가 베니그노 아키노를 만난 것은 19세때인 52년.미국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살 위인 베니그노를 만나 마음이 끌렸다고 고백한다. 당시 베니그노는 명문 아키노 집안을 더욱 빛낼 젊은이로 이미소문나 있었다.당시.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베니그노는 이미 18세때 마닐라 타임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고,필리핀 공산게릴라 지도자인 루이 스타 루크와 단독인터뷰를 하는등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이어 필리핀 정치사에 수많은.최연소'기록을 남긴 베니그노는 승승장구해 70년대초 장기독재를 꾀하고 있던 마르코스 정권을 위협하는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베니그노의 대중적 인기에 겁먹 은 마르코스 대통령은 73년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정부전복 혐의를 씌워 그를 구속하기에 이른다. 7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베니그노는 80년 심장병 치료를 위해 미국 체류를 허용받았고 3년후 야당 통합을 위해 귀국했다가 마르코스 친위 군인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코라손 아키노의 등장은 이때부터다.그전까지 평범한 가정주부에불과했던 그녀는 필리핀을 휩쓴 민주혁명의 상징으로 부각됐고 86년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마르코스의 선거부정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베니그노의 정치적 투쟁 과 암살이라는비운을 발판으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탄생한 셈이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취임이후 코후앙코 집안은 정치적 진출이활발해졌다.아키노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친정 사촌 에두아르도 코후앙코는 92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아키노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피델 라모스 현 대통령과 경선했다.9 2년 타를라크주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코라손의 남동생인 호세 코후앙코가 코라손의 4촌형제인 메르세데스 코후앙코 테오도르(에두아르도 여동생)와 경선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타를라크주 주지사 선거에서도 코라손의 올케인 마르가리타 코후앙코(호세의 부인)가 코라손 4촌인 헨리 코후앙코(에두아르도 동생)와 대결하는등 코후앙코 집안 인사들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했다. 반면 아키노의 1남4녀중 정치에 나선 사람은 없으며 막내딸인 크리스티나는 인기 영화배우및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쿠데타 진압과 정권 안정에 기여한 피델 라모스 대통령에게 92년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후 요즘엔 아키노 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빈민층을 지원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코라손은 지난해 가진 한 기자회견에서“대통령때보다 더 바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아키노 집안을 보는 필리핀인들의 시선은 착잡하다.마르코스 독재를 종식시키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성과를 남겼지만 통치기간중 끊임없는 쿠데타및 정치불안으로 경제와 국민생활은 뒷걸음질했기 때문이다. 〈김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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