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칼럼>한보청문회를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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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강남의 몇몇 호텔에서는 낮시간에도 웬만한 중견기업의 중요인사들이 커피숍이나 헬스클럽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자주 있다.한창 바쁘게 근무해야 할 시간에 이들이 이런 곳에서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곳들이 한국적 이면(裏面)정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묘사되는 정치의 모습은 국회에서,또는 정당에서,또는신문에 흔히 나타나는 정치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거기에선 토론이나 협상의 내용은 무의미하다.오로지 권력의 크기와 그것을 타고 흐르는 돈의 흐름,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 맥의 학연과 지연,혈연 관계들이 정치를 구성하는 중요변수로 떠오를 따름이다.이곳에서 정치권력의 크기는 권력 핵심부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그 거리가 가까울수록 힘의 크기는 크고.실세'다. 옛날에는 대통령의 부인들과 친척들,그리고 몇몇 측근들이 주로오르내렸다.군인들의 서슬이 퍼럴 때는 육사 몇기 출신인지가 중요 평가항목이었다.아무개 기업이 군출신 아무개를 끌어들여 군공사를 싹쓸이했다느니 아무개 은행장은 청와대와 안 팎으로 가깝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정부.주요기업체나 금융계의 인사는모두 그런 관계에서 분석되었고 그것을 통한 권력의 소장(消長)이 점쳐졌다.그런 분석이 훨씬 현실정치를 꿰뚫고 있으며,더 적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한국정치의 불행이었다. 그런 유의 이면정치가 요즘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정한파가 몰아칠 때 잠시 잠잠한 것 같더니 그후 곧이 이면정치의 현장은 주역들의 면모만 바뀐채 되살아났다.여전히대통령의 아들과 청와대의 실세,그리고 그곳과 가 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관계로 이면정치의 판은 짜여지고 평가되었다. 한보사태는 바로 그런 이면정치의 한 전형인 것 같다.수조원의돈이 거의 아무런 담보장치 없이 특정한 회사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한국적 정치현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외압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것이다.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야당은 국회의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했다.그러나 지금까지 몇개의 정치적 특혜사건이 그랬듯이 이번 사건도 흐지부지될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이들 이 없지 않다. 우선 여권이 그들의 최대 악재가 될 이 사건을 올 12월의대선에 영향을 줄 시기까지 끌고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5공 초기 장영자사건때도 군부정권은 그들과 무관하다면서 철저수사를 주장했지만 결국 권력핵심부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에 이르자 수사의 규모를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보의 로비 범위가 원체 넓고 규모가 크다는 점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수서때도 의혹은 권력의 최심부에 모아졌지만 청와대의 일개 민정비서관과 여야의원 몇명을 잡는데 그쳤다.한보측이재산권 포기 거부를 천명하고 나선데는“입만 열면 여럿 다친다”는 엄포를 깔고 있는것 같다. 때문에 국회의 국정조사권이 제대로 발동되기를 기대한다.최근의잇따른 부패사건에 낙담하고 있는 국민의 의혹을 씻는 것이 가장중요하며 그런 차원에서 공개적인 국회청문회가 가장 합당하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국정조사가 제대로 되려면 여권이 협조해야 한다.과거 여권은 국회의 국정조사에 말로는 찬성하면서도 실제로는 검찰의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줘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관련자들의 국회증인출석을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회의 조사권 발동을 봉쇄해 왔다.외압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의혹의 대상이 된 모든 사람들을 증인으로 출석시킴으로써 이면정치의 실상을 파헤쳐야 한다.여권은 그런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야당이 이 사태를 단순한 정치공세로만 몰아가거나 대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도구로 이용하려든다면 오히려 여권의 전략에말려들어가 국회조사를 망칠 수도 있다.과거 몇몇 청문회때 야당측이 아무런 준비없이 목청만 높이고 절차를 문제 삼아 국회를 교착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경우를 보아왔다.만약 야당이 그런 짓을 한다면 야당에도 의혹의 시선이 보내질 것이다. 문민정부가 정말 스스로의 결백성을 증명하려 한다면 이면정치의전모를 드러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이미 여권 대선후보중에 외압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인물들도 있다.따라서 필요하다면 이들을 과감하게 숙정하겠다는 의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아무런 성역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뉴미디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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