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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마의 기적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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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93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삼호물산이 회생의 돌파구로 삼은 것도 아르헨티나 오징어였다. 문제는 오징어의 내장이었다. 오징어의 무게 중 내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35%. 그러나 오징어를 잔뜩 잡아 한국으로 실어와도 통오징어 형태로 소비되는 것은 30%도 채 안 됐다. 70% 이상은 원형이 보존되지 않는 형태로 가공됐다. 따로 내장을 떼어내는 비용만 더 들 뿐이었다.

궁리 끝에 고안해낸 것이 바로 ‘할복기(割腹機)’다. 오징어를 바다에서 끌어올릴 때 조금 더 배 안쪽으로 잡아당겨 못이나 칼날을 댄 장치에 오징어 배를 갖다 거는 것만으로 내장은 바로 제거됐다. 즉석 내장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배가 가벼워진 만큼 더 많은 오징어를 싣고 올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오징어 내장을 미끼로 ‘메로’ 같은 잡어도 덤으로 잡아 올 수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은 것이다. 경영악화로 앞길이 막막하던 삼호물산은 법정관리 1년 반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나오시마(直島). 일본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 사이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 떠 있는 자그마한 시골 섬이다. 인구가 3470명이다.

1년 반 전 나는 이곳을 둘러보고 ‘나오시마의 기적’이란 칼럼을 썼다. 나오시마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격감하고 벌거숭이 산에 불과한, 버려진 섬에 가까웠다. 이곳을 일본의 출판·교육사업 그룹인 ‘베네세’와 주민들이 손잡고 ‘예술의 섬(art island)’으로 변신시켰다. 200년 지난 빈 고민가(古民家)를 작품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남들이 마다하는 산업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유치해 섬의 경제를 되살린 나오시마의 역발상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취재차 1년 반 만에 다시 나오시마를 찾았다. 나오시마에선 특산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식당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올해 이 섬을 찾는 관광객 추정치는 약 34만 명. 섬 인구의 100배다. 5년 전에 비해 6배가 뛰었다. 상당수가 외국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나오시마의 성공이 몰고 온 파급효과였다.

데시마(豊島). 나오시마에서 배편으로 20분 거리의, 인구 1100명의 작은 섬이다. 이곳에선 요즘 대규모 미술관 건설이 한창이다. 나오시마를 일으켜 세운 ‘베네세’와, 요즘 상한가의 일본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西澤立衛)의 공동작업으로 ‘제2의 나오시마’를 일궈내려 한다. 데시마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의 이누지마(犬島)에도 베네세가 기획한 ‘제련소’라는 이름의 미술관이 최근 세워졌다. 인구 60명의 섬에 미술관이 세워졌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 섬들이 중심이 돼 2010년 7월부터 ‘세토나이 국제예술제’를 출범시킨다. 나오시마·데시마·이누지마 등 주변 7개 섬이 연계해 다양한 예술작품 전시와 공연을 매년 100일 동안 계속한다. 세토나이카이의 섬들을 명실상부한 ‘예술의 섬’으로 전 세계에 각인시킨다는 구상이다. 하루는 나오시마에서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의 ‘빨간 호박(red pumpkin)’을 감상하고, 하루는 데시마로 건너가 프랑스의 크리스티앙 볼탄스키가 연출하는 설치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니, 기발한 발상이다. ‘나오시마의 기적’은 이제 2단계인 ‘세토나이카이의 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경제가 어려워 모두가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고정지(思考停止)의 상태로는 앞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오징어 배를 가르는, 시골 섬들을 국제예술제가 열리는 세계적 명소로 변모시키는 창조적 발상이 여기저기서 쏟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터널의 끝도 빨리 보이지 않을까.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