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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100년 묵은 골프채와 10살도 안 되는 동반자들

중앙일보

입력

영국에서 골동품 골프 클럽 세트를 장만해 가는 것이 우리 미션 중에 하나라 그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엔틱 골프샵을 기웃거려오던 바였다. 그러나 가격도 착하지 않을 뿐더러, 풀세트로 완비된 구성물을 찾을 수 없어 계속 헛걸음을 해왔다. 하지만 행여 골동품 클럽을 장만했다 하더라도 실재 라운드에 사용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흡사 고려청자에 밥 퍼 먹는 기분이 아닐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비가 오락가락하는 이른 아침임에도 주저 없이 출발했다.

Musselburgh 골프장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읍내 분위기의 작은 마을 길을 돌아 도착한 클럽하우스.

그러나 클럽하우스로 추정되는 그 건물에는 역대 클럽 챔피언들의 면면이 남아 그 곳이 클럽하우스임을 짐작케 할 뿐 아무리 문을 두드려봐도 응답이 없었다.

혹시 점심 시간이라 클럽하우스를 닫아버리나 싶어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길 건너 70m쯤 떨어진 곳에 작은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현지인에게 그 곳 사정 이야기라도 물어볼 목적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그 곳이 경기 운영을 담당하는 프로샵이라고…. 클럽하우스는 건물만 남아있을 뿐 현재 운영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The Open을 여러 차례 치뤄낸 골프장은 일찌감치 Royal 칭호를 따냈으나 협소한 이 곳 부지 때문에 Royal의 이름만 달랑 들고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한다. 그래서 원조 골프장 자리엔 경마장이 들어섰고 남은 부지에 9홀을 남겨 경마가 없는 날에만 골프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허름한 프로샵에는 그 역사를 증명하듯 골프 박물관에서 보았던 골프공과 클럽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찾아간 날은 경마가 없었다. 코스는 가운데 경마장을 중심으로 9홀이 마장을 둘러싸고 흩어져 있었다. 당연히 좋은 코스는 아니었다.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완벽한 퍼블릭 골프장….

그러나 복병이 만만치 않았다. 경마장과 골프장의 DMZ 지역에 형성된 러프…. 굴곡 없이 평평한 이 골프장에는 오히려 볼의 낙하 지점을 기억 동시킬만한 지형지물이 없었다. 볼의 낙하지점에 시선을 꽂고 정확히 도착해도 원거리에서 수평으로 가늠했던 그 곳엔 볼이 없었다.

그러나 코스는 어차피 내 관심밖에 있었다. 렌트한 히코리 골프채는 5번 우드와 아이언, 어프로치용 아이언, 그리고 퍼터의 단촐한 풀세트였다. 샤프트와 헤드가 이름 그대로 '우드'로 만들어진 크리크는 헤드감이 묵직했다. 평소의 스윙 속도 대로 백스윙을 하면 헤드의 반동으로 탑에서 한 번 휘청하는 느낌이 들었다. 임팩트의 반동도 온 몸으로 느껴졌고 그 여운은 몇 초간 지속되며 팔을 타고 온 몸으로 떨림을 전했다. 마치 만화 <톰과 제리>에서 제리에게 망치로 일격을 당한 톰이 충격의 여운이 남아 덜덜거리며 온 방을 휘젓는 그 장면이 내 몸으로 재연되는 기분.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리가 꽤 난다는 사실이다. 스윙 속도만 늦춰주면 방향성에도 크게 오차가 없었다.

더 경이로운 대상은 어프로치용 아이언. 얇은 철판을 사용한 아이언은 칼처럼 예리했다. 50야드 거리에서 풀스윙으로 정확히 공의 뒤를 찍었는데 순간… 김장 배추 겉 잎사귀를 칼로 쳐내는 느낌처럼 리듬감 있고 탄력 있게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느낌이 전해졌다. 곧바로 공의 궤적을 쫓아 보니 공보다 찬란하게 날고 있는 그 것… 가로 30cm, 세로 10cm의 직사각형 뗏장이 저만치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고 있었다.

아아… 진실로 아름다운 규격! 소렌스탐도 울고 갈 예리한 사이즈, 30 X 10 !

아이언도 쓸어치는, 결국 디봇이 아닌 아이언과의 마찰로 잔디를 타죽게 만드는 특수 타법을 구사하던 나. 그래서 늘 조롱과 질타의 대상이 되어온 내 아이언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뗏장이 만들어 진 것이다. 오… 신이시여! 얼른 주워와 그 자리에 놓고 발로 밟아주니 티도 나지 않게 보수가 되었다.

더불어 잊지못할 동반자들…. 그간 많은 동반자들과 조인을 해 왔지만 Musselburgh에서 만난 팀이 단연 최연소팀이었다. 동반자 두 명의 나이를 모두 합해도 13세!

8살짜리 형은 제법 스윙이 예리한 것이 구력이 5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녀석은 이제 막 골프를 시작한 5살짜리 동생을 끌고 우리 앞 팀으로 출발했었다. 그러나 버벅대는 동생과의 라운드가 재미가 없었는지 3번 홀 그린에서 우리를 기다려 당돌하게도 조인 제의를 해왔다. 맹랑한 것…. ㅋㅋ

녀석은 남편이 갖고 있는 테일러메이드 새 모델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이 드라이버 비싼 것이냐, 새로 나온 것이냐, 어디서 샀냐…. 내 히코리 클럽에도 관심 좀 가져주십사 농담을 건냈다. "저 아저씨가 욕심이 많아서 자기만 좋은 새 채를 쓰고 나한테는 이렇게 오래된 채만 쓰게 한다." 했더니 그때부터 나를 위로하느라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선하다. 자기도 누군가가 쓰던 채를 얻었고, 자기 아빠도 낡은 채를 쓴다고…. 골프는 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허걱!

동생 녀석은 우리가 한 타 치고 전진할 때 세 네 타를 끊어 치면서도 굴하지 않고 쫓아오더니 7번 홀에 이르러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자 자기 집이 7번 홀에서 가깝다고 형과 함께 가방을 챙겨 뛰어가 버렸다. 이런… 어린 것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녀석들 때문에 플레이가 지연되지만 않았어도 그 심한 비를 맞기 전에 9홀을 끝냈으련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프로샵으로 돌아가니 매니저가 히코리 골프채 사용 소감을 물어왔다. 이 클럽을 내게 팔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그 5번 크리크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언제고 클럽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되면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를 달라기에 명함에 형광펜을 두 줄이나 긋고 별표 땡땡 쳐서 넘겨줬다.
허나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