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살이 중국 소녀 ‘뉴질랜드 드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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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뉴질랜드에서 최초의 아시아인 장관이 탄생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세에 뉴질랜드로 이주한 중국 출신의 팬시 웡(53·여·사진) 의원이 주인공. 8일 총선에서 승리한 뉴질랜드 국민당의 존 키 총리 당선인은 17일 웡 의원을 소수민족부 장관과 여성부 장관에 임명한다고 밝혔다. 뉴질랜드 내셔널비즈니스리뷰에 따르면 웡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오클랜드 보타니에 출마해 당선됐다. 웡 의원은 “내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뉴질랜드는 어떤 사람이든 성공할 수 있는 열린 사회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라며 기뻐했다.

그의 성공은 가난과 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며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5세 때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홍콩 생활은 열악했다. 선원이던 아버지는 1년의 절반 이상 집을 비웠다. 그와 어머니, 남동생 등 4식구는 아파트의 방 한 칸을 빌려 지냈다. 아파트에는 일곱 가족 40여 명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부엌·화장실·욕실은 모두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자녀 교육만큼은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굳은 의지로 살아가라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1974년 뉴질랜드 이민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그의 가족은 크라이스트처치에 정착해 생선·감자 튀김 가게와 싸구려 햄버거집을 운영했다. 캔터베리대를 다니면서 말레이시아 화교인 남편 새미를 만났다. 졸업한 뒤에는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했고 89년 캔터베리 지방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예산을 600만 달러나 깎아 ‘600만 달러의 여성’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96년 총선 때 뉴질랜드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이민 반대 정책을 표방한 상대 당에서 ‘이름뿐인 의원’이라고 비하해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그는 “요즘에도 나의 영어 말투나 억양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있다”며 “나는 언제나 다른 뉴질랜드인과 똑같이 대우받기 위해 투쟁해 왔다”고 강조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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