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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긴 길에서 만난 교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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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12면

1 납작한 돌길이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철학의 길’ 2 ‘철학의 길’이 내려다보이는 지붕에서 책 읽는 기분은 어떨까 3 고급 찻집ㆍ음식점으로 영업 중인 기온 신바시의 전통 가옥들

언젠가 스페인 여행책에서 읽은 구절. 그라나다에서 구걸하던 어느 맹인이 이런 팻말을 들고 있더란다. “이 세상에 태어나 그라나다에서 눈먼 채 살아가는 것 이상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라나다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구다.

일상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때 일본의 고도(古都) 교토를 걸어라.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데 한없이 감사하게 될 터이니. 산사의 작은 돌멩이 하나도 천년의 사연을 간직한 곳. 붙잡을 수 없는 계절에서 덧없는 시간을 느끼게 되는 곳. 하이쿠(俳句) 시인 고바야시 잇사가 읊은 대로 “울지 마라, 풀벌레야/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그렇게 가을의 교토가 두 발 아래 드리웠다.

4 아라시야마 덴류지 북쪽 대숲은 영화 촬영지로도 종종 쓰인다

‘철학의 길’에서 책 읽는 여자
산책 일보(一步)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부터. ‘교토의 808절(京都の八百八寺)’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토엔 유서 깊은 신사ㆍ사찰이 많다. 시내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기요미즈데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절이다. 가파른 13m 절벽 경사면에 139개의 큰 기둥을 세워 만든 본당 앞마루에서는 매년 12월 12일 그해 세태를 반영한 ‘올해의 한자(漢字)’를 발표하기도 한다.

봄 벚꽃과 가을 단풍의 명소인 기요미즈는 그에 걸맞게 혼을 빼놓을 만큼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다. 노을 속 만추(晩秋)를 감상하는 여유 따윈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검정 교복의 수학여행 부대가 쉴틈 없이 밀려들었다.다행히 ‘교복 부대’는 ‘철학의 길’까지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기요미즈데라의 북동쪽 긴카쿠지(銀閣寺) 입구에서 구마노냐쿠오지진자까지 이어지는 약 2km의 길이다.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1870~1945)가 사색에 잠겨 걸었다는 데서 이름을 얻었단다. 비와코 수로를 따라 납작한 돌길을 걷다 보면 양옆으로 주택가가 이어지는데, 사이사이 갤러리와 상점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5 아라시야마의 정취를 담은 아담한 가게들 6 산 중턱 기요미즈데라로 오르는 언덕길엔 전통 2층 목조가옥이 즐비하다

시선을 치켜뜨니 1층 처마지붕 위에 나무 벤치가 보인다. 젊은 외국인 여자 한 명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보낸 뒤 다시 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각자의 사색을 품고 나는 책 밖의 길을, 그녀는 책 속의 길을 걸었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行く我にとどまる汝に秋二つ)”-마사오카 시키.

시간이 멈춘 기온의 밤
교토의 중심지는 시조가와라마치. 다카시야마ㆍ한큐 등 대형 백화점과 각종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다. 그러나 진정한 교토의 중심은 기온(祇園)이다. 교토에서 기대하는 ‘가장 교토스러운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해질녘 하나미코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옛날 영화의 세트장에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적요한 거리엔 붉은 등불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대나무 발을 내건 전통식 2층 목조 건물은 대개가 식당ㆍ찻집이다. 가끔 등엔 ‘마이코(舞妓)’란 글씨가 적혀 있는데, 게이샤(기생)가 되기 전 견습생 여자아이란 말이다. 마이코가 서빙하는 음식점이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기모노 차림에 인형 같은 분장을 한 젊은 여성들이 쉽게 목격된다.

정처 없는 발길은 기온 신바시로 이어진다. 전통 건축물 보존 지구로 지정된 기온 신바시는 작은 개울을 따라 전통 가옥이 이어지는 동네다. 수양버들이 우거진 창가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에 함께 빨려들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곳 가격은 상상초월. 길 모퉁이 오코노미야키 집에서 간단한 안주와 나마비루(생맥주)를 시켰다. 비누거품처럼 부드러운 포말이 혀끝에 와 닿았다.

풍경화 속에 들어가다, 아라시야마
교토역에서 JR선으로 15분 정도 가면 아라시야마다. 교토 사람들이 즐겨 소풍 가는 곳이라는 말 그대로 교토 속의 전원 같은 곳이다. 오이가와(大堰川)를 가로지르는 도케쓰교(橋)엔 한가롭게 풍경화를 그리는 남자가 있고, 그 풍경을 다시 사진기에 담는 관광객이 있다. 그 풍경 속에, 내가 들어가 걷는다.

역 주변엔 산책 코스 안내도가 상세히 붙어 있다. 덴류지로부터 사가노 지역까지 이어지는 반나절 거리다. 특히 덴류지의 북문 바깥 길은 낮에도 해를 가릴 듯 울창한 대숲이 장관이다. 인간의 등뼈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하늘로 치솟은 대나무들은, 작은 상념에도 쉽게 흔들리는 산책자를 다그치는 듯하다.

흙과 돌과 이끼가 안내하는 길은 조잣코지와 기오지를 거쳐 사가도리이모토로 이어진다. 초가지붕과 저잣거리풍의 민가가 이어지는 이 지역은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봄밤 매화가 섬세하게 수놓인 테이블보에 넋을 뺏긴 채 만지작거렸다. 누에고치로 만든 쥐ㆍ돼지 인형들은 또 얼마나 섬세한지. 그 모든 감탄을 압도하는 해질녘의 정적. 아라시야마에 기념관이 있는 일본의 국민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노래 가사처럼, “모르는 사이 여기까지 걸어왔네, 좁고도 길었던 그길/…/지도조차 없었지만 그 또한 인생/…/살아간다는 건 여행하는 것, 끝이 없는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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