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새벽 인력시장 낯선 얼굴들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13일 새벽 5시 경기도 성남시 태평역 근처. 어두운 거리에 ‘인력’이라고 적힌 간판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S인력사무소 앞. 이마까지 내려 쓴 모자에 점퍼 차림의 남자 세 명이 연장을 담아 축 늘어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일 구하러 왔어요?” 한 남성이 말을 건넸다. “요샌 새로 오는 사람은 잘 안 씁디다. 한번 알아나 보슈.”

이들을 따라 들어간 사무실에는 긴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버스터미널 대합실 같았다. 5시30분쯤 사무실은 90여 명의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갑자기 한두 달 전부터 사업하다 망하거나 직장을 잃고 이리로 오는 사람이 많아졌어. 지난해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요샌 열에 두셋은 이런 일을 처음 하는 ‘초짜’라니까.” 인력사무소 권모(57) 소장은 최근 이곳을 찾는 이가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성남시 인력시장은 수도권 최대 규모다. 태평역과 모란시장 일대에만 70여 개의 인력사무소가 밀집돼 있다. 김인봉 성남시 직업소개소협회장은 "하루 평균 2000여 명 정도가 일을 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년 경력도 허사”=맨 앞줄에 앉아 있던 정모(48)씨는 두 달 전까지 컴퓨터 대리점을 운영했다. 그는 “20년 동안 대리점을 했는데 올 들어선 장사할수록 빚만 늘었다”고 말했다. 빚을 갚고 남은 돈은 500만원. 정씨는 아내와 함께 태평역 부근에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은 뒤 매일 이곳에 나온다. 정씨는 “나처럼 멀쩡히 사업하다 망해서 온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이 집인 조모(53)씨는 근처 6000원짜리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달 전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다. 20년간 남성복을 만드는 재봉사로 일했지만 값싼 중국산 때문에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한 달 전 사무소에 나와 처음 건축 일을 해봤다는 박모(39)씨는 “일을 갔다 오면 밤새 앓지만 현장에서 찍히면 부르지 않기 때문에 아픈 티도 낼 수 없다”고 털어놨다.

◆“한 달 수입이요…”=5시40분쯤 사무소에는 인력을 구하는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OO씨, 유OO씨, 어제 갔던 데 알지? 서둘러요!” 호명을 받은 이들은 환한 얼굴로 사무소를 빠져나갔다. 현장 청소나 잔심부름을 하는 일이다. 일당에서 알선 수수료와 교통비, 밥값을 빼면 수입은 5만원 정도. 운이 좋아 한 달에 20일가량 일해야 100만원을 번다.

6시가 지나자 사무소는 조용해졌다. 일을 구한 이들은 대기 중인 승합차에 올랐다. 허탕을 친 이들은 사무실 주변에 모여 있었다. 목수 출신의 박모(45)씨는 “보통 일당으로 12만원을 받았는데 요즘에는 공치는 날이 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인력사무소 측은 올해는 불황 때문에 예년보다 일찍 공사를 끝내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사무소도 다음 달부터는 격일로 일자리를 배정할 판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인생의 종점에 왔다고 하잖아. 근데 종점에는 들어오는 차만 있는 게 아니라 나가는 차도 있어. 여기 사람들 얘기는 안 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어….”

이날 일감을 구하지 못한 50대 남성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대포나 한잔해야겠다”고 답했다. 오전 6시 30분,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 날이 밝고 있었다.

성남=장주영 기자

[J-HOT]

▶"동성애 합법화하면 전투력 무너질 것" 반발 클듯

▶실업계 고교 출신 그가 KAIST 들어간 비결

▶ 충청도면 몰라도…부산, 수도권 규제완화 왜 반발?

▶WSJ 1면 장식한 '투자손실 분노한 한국인들'

▶서울에서 야경 가장 아름다운 명소 '베스트 3'

▶ "매일 300만원씩 까먹다 2000만원씩 벌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