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는 변방의 배우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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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0면

연극 ‘사라예보의 고도’
12월 21일(일)까지 스튜디오 동숭무대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6시, 일 오후 3시(월 쉼)
문의 02-765-7073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11월 18일(화)~12월 28일(일) 산울림소극장
화~금 오후 7시30분, 토 오후 3시·7시
일 오후 3시(월 쉼)
문의 02-334-5915, 5925

대학로 변방에서 나란히 ‘고도’를 기다리는 배우들이 있다. 미아삼거리역 ‘스튜디오 동숭무대’에선 일본 작가 히로시마 고야가 쓴 ‘사라예보의 고도’가 한국 초연 중이다. 홍대앞 산울림소극장에선 원작자의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고도를 기다리며’가 18일 막을 올린다.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연출 임영웅.사진)는 일종의 금의환향 공연이다. 원작자 사뮈엘 베케트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지난달 초청공연을 했다. 더블린 베케트센터 공연은 “베케트 작품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라는 등 현지 평론가의 상찬을 받았다. 1969년부터 40년간 1100회 이상 공연됐던 ‘산울림 버전’이 세계인의 눈높이에도 어긋나지 않음을 증명한 셈이다. 이번 공연엔 94년부터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만 아홉 차례 오른 한명구 등 ‘더블린 캐스팅’이 그대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사라예보의 고도’(연출 임정혁)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극중극으로 담았다. 연극은 고고와 디디라는 배우들이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다리를 저는 고고가 무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반면, 연출자 겸 배우 디디는 관객이 들지 않는 연극의 현실에 회의를 느낀다. 두 사람의 논쟁은 극장 밖 현실에 관한 규정으로 이어진다. 고고는 “바깥은 전쟁 중”이라며 “총소리가 들린다”고 하지만, 디디는 “그건 착각이자 환상”이라고 반박한다.

작품은 어쩔 수 없이 2004년 타계한 영민한 평론가 수전 손태그를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지성으로서 사회운동에 깊이 참여했던 손태그는 93년 내전의 한복판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다. 세계의 반전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라예보의 고도’는 반전 메시지보다 전쟁 같은 현실에서 연극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 특히 한국 상황에선 상업 연극의 바깥에서 연극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되묻는 데 힘을 준다.

객석보다 작은 무대. 평소 연습실로 쓰는 공간에 최소한의 세트만 설치한 채 진행되는 극은 ‘오프 대학로’적 기개를 보여준다.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극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려는 의도가 쉬 읽힌다. 그러나 배우들의 발성은 부정확하고, 고성과 눈물에 의존하는 연출은 ‘지적 감상’마저 방해한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마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고, 집에 돌아가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라고 했던 베케트의 호연지기가 새삼 그립다.
변방의 힘은 중심을 부정하는 자유와 뚝심이다. ‘세상과 한번 맞짱 떠볼 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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