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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카드 대란은 없다 … 신상품 투자 늘릴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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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24면

미국발 금융위기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에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이어 자동차 할부금융과 신용카드 부실 문제가 곧 터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물 경제 침체로 소비자금융 연체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미 최대 신용카드회사인 아멕스는 지난달 30일 10%(7000명) 감원 방침을 발표했다.

‘위기 관리 전도사’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실업자 증가로 카드 사용이 줄면서 경영실적이 안 좋아지자 자구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소비자금융의 사정은 어떨까. 일각에선 2002년 카드 대란의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강도 높은 금융대책을 쏟아냈지만 시중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대표를 겸하고 있는 정태영(48·사진) 사장은 “카드 대란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카드 대란이 한창이던 2003년 1월 현대카드 대표이사 부사장에 취임한 그는 그해 10월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현대캐피탈 대표도 함께 맡아 두 회사를 2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실물 위기 대비해 안전벨트 조일 때
“이번 위기는 세계에서 멀쩡한 나라가 하나도 없을 만큼 100년 만에 한 번 올 공황이며, 두고두고 역사교과서에 나올 사건이다. 이런 위기는 안 오는 것이 물론 좋지만 적당한 위기는 순기능도 있다. 그동안 과열되었던 경쟁을 식혀 미래에 올지 모를 더 큰 재앙을 예방하는 의미가 있다.” 지난달 30일 정 사장이 임직원에게 e-메일로 보낸 ‘CEO 메시지’의 한 대목이다. 정 사장은 카드 대란을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다. 누구보다 금융위기의 폐해를 잘 안다.

-외환위기 때 같은 어려움이 또 닥치는 건가.
“이번 위기가 (우리에게) 외환위기만큼 심한 타격을 주지는 않을 걸로 본다. 하지만 치유엔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소방서(미국)에 불이 난 상태여서 세계적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물을 끌어다 불을 꺼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위기는 이제 시작 단계다. 금융위기는 실물경기 하강 쓰나미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실물경제 위축에 대비해 안전벨트를 조일 때다.”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캐피탈 사옥 지하 1층에 있는 도서관(위). 지난 7월 제주도 해비치호텔에서 열린 2007년 신입직원 환영행사(아래).

-미국에선 신용카드 부실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는데.
“(국내 카드업계의) 연체율이 미세하게 올라가고는 있지만 우려할 단계는 전혀 아니다. 카드 대란은 카드 남발로 돌려 막기(카드 이용 대금을 다른 카드의 현금서비스를 받아 결제하는 것)를 하던 게 한계에 부닥치면서 갑자기 터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앞으로 전개 과정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준비된 대란은 없는 법이다. 과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카드 대란 사태는 안 일어날 걸로 본다.”

정 사장이 현대카드·캐피탈 대표에 취임한 2003년 당시 두 회사의 경영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해 현대카드의 고객 연체율은 계산이 무의미할 정도로 치솟았고 영업적자 규모는 8340억원(현대카드 6090억원, 현대캐피탈 2250억원)에 달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둘째 사위로 현대·기아차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을 맡고 있던 그가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그는 “현대차그룹에서 금융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카드는 대출카드가 아니다
대표 취임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작업은 부실 고객 정리였다. 무리한 외형 경쟁이 빚은 잔해를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한편으로는 무리한 영업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현금서비스·카드론 등 대출에 대한 충당금을 100% 쌓도록 한 것이다. 대신 신용카드 본연의 업무인 신용판매 기능을 강화했다. 현재 현대카드의 신용판매 비중은 85%로 업계 평균(약 60%)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윤이 높은 카드론·현금서비스 영업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정 사장은 ‘신용카드는 대출카드가 아니다’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조달 자금의 만기 미스매치도 없앴다. 예를 들어 3개월짜리 대출 자금은 3개월 만기로, 3년짜리 대출 자금은 3년 만기로 빌려오도록 했다. 현재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운영자금 23조원의 대출·상환 만기 차이가 최대 20일에 불과하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정 사장의 원칙 경영은 강력한 원군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된다. 세계 우량기업의 상징인 미 GE가 2004년 8월 현대캐피탈에 9500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GE는 이듬해 8월엔 현대카드에도 6800억원을 투자했다. GE의 투자 덕분에 현대카드·캐피탈은 신용등급이 높아져 안정적인 경영 기반을 다지게 됐다. GE는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지분을 43%씩 갖고 있으며, 2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GE 파견 인사 중 최고위층인 버나드 반 버닉 부사장은 제휴 배경으로 ▶강한 브랜드 파워 ▶잘 짜인 영업·유통망 ▶우량한 고객 ▶우수한 인재 등을 꼽았다. 현대카드·캐피탈의 모회사가 현대차라는 점도 물론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고 덧붙였다.

버닉 부사장은 현대의 위기 관리 노하우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끊임없는 소통과 교육이다. 위기 관리가 기업문화로 자리 잡아 임직원 모두 알아서 보수적 운영을 하고 채권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전담 조직의 운영이다. 매월 정기적으로 사장·부사장 등이 참여하는 리스크관리위원회를 열어 대출 현황 등 위기 지표를 점검하고 관리하고 있다. 셋째는 각종 위기 관리 툴의 도입이다. 현대캐피탈은 2006년 6월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도입하면서 총부채상환비율(DTI) 개념을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 담보와 함께 소득수준까지 감안해 대출을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140명 규모의 사기방지(Anti fraud)팀을 발족해 선제적으로 리스크 관리를 하고 있다.

정 사장의 원칙 경영에 GE의 위기 관리 노하우가 접목되면서 회사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9월 말 현재 현대카드의 연체율은 0.52% 수준이다. 지난해(0.4%)보다 약간 높아지긴 했지만 카드업계 평균치(6월 말 현재 3.43%)에 비하면 훨씬 낮다.
최근 자금 시장 경색 속에서도 현대의 평균 조달 금리는 6% 남짓이다. 신규 조달 금리는 7~8%대지만 장기 조달한 자금이 60%가 넘어 평균치가 낮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현대카드는 LG카드를 인수해 1위에 오른 신한카드에 이어 KB·삼성과 함께 2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업계에선 현대카드의 급성장은 현대차 그룹의 배경 덕분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에 대해 정 사장은 “부잣집 애는 과외하기 때문에 무조건 공부 잘할 거란 얘기와 똑같다”며 “GE가 아무한테나 1조8000억원을 투자하겠느냐”고 일축했다.

똑같이 해선 못 이긴다
정 사장은 현대카드·캐피탈 경쟁력의 비결로 스피디한 회의문화를 꼽는다. e-메일과 메신저 대화방으로 일상적인 회의를 대폭 줄이는 대신 현안을 논의하는 중역회의에선 계급장 떼고 토론하는 게 정착됐다. 회의실 자리 배치는 따로 안 하고 도착 순서대로 자유롭게 앉는다. 대신 사전 공지된 회의 안건을 숙지해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정 사장은 “임원 퇴출 1순위는 실적이 저조한 사람이고, 다음은 회의 때 의견을 안 내는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정 사장은 리스크 관리엔 극히 보수적이지만 필요한 투자만큼은 화끈하게 한다. 그래서 ‘진보의 탈을 쓴 보수’라는 평가를 듣는다. 2003년 1월 현대카드 대표 취임 직후 행보가 단적인 예다. 구조조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공격적인 마케팅·홍보를 지시했다. “8000억원대 적자에 1000억원 적자가 더 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설명과 함께다. 덕분에 단일 카드로는 처음으로 600만 고객을 돌파한 ‘M카드’가 그해 5월 탄생할 수 있었다.

브랜드 관리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캐피탈 본사에 가면 어느 사무실에서나 똑같은 사무용품과 집기를 쓰는 걸 볼 수 있다. 수첩·컵 등 개인 물품도 예외가 아니다. 각종 상품과 광고에 들어가는 한글·영어·숫자는 해외 업체에 의뢰해 개발한 고유 서체만 쓴다.

“미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항상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대중 앞에 선다. 제품도 애플스럽다는 말이 나오듯이 모든 게 통일된 이미지를 준다. 우리도 ‘현대스러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현대스러움의 고집은 광고에서도 확인된다. 현대카드·캐피탈의 광고는 경쟁업체와 거꾸로 간다. 경쟁업체가 이미지 광고에 주력하면 개별 상품광고로 맞대응하는 식이다. “10여 년 앞서 시작한 경쟁사와 똑같이 해선 이길 수 없다. 키 큰 사람과 농구를 하면 반쯤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다른 게임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그의 차별화론에 따른 것이다.

버닉 부사장은 “현대와 제휴로 GE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특히 마케팅과 브랜드 관리는 독창적”이라고 평가했다.

정실 고과는 해사 행위
현대카드·캐피탈엔 독특한 제도가 많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끼’를 중시하는 정 사장의 경영 방침이 반영된 결과다.

두 회사 급여체계는 50% 기본급과 50% 보너스로 이뤄져 있다. 부서원 모두가 모인 가운데 한 해 업무 계획을 발표하고 나중에 결과를 평가해 보너스를 차등 지급한다. 부장급의 경우 많게는 연봉이 5000만~6000만원까지 격차가 벌어진다. 정실 고과는 해사 행위로 간주한다. 성과만이 유일한 평가 척도다. 한 차장급 간부는 “처음엔 불만이 많았으나 평가 원칙이 명확하다 보니 이젠 누구나 수긍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엔 ‘커리어 마켓(Career Market)’이란 사내 온라인 인력시장을 개설했다. 본인의 적성·희망에 맞춰 업무 배치를 하기 위해서다.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원이 자신의 이력을 이곳에 등록하면 부서장이 필요한 인재를 뽑아 쓸 수 있다. 거꾸로 부서장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공모하면 응모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 부서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누구나 지원 가능하며, 부서장은 인사 이동을 거부할 수 없다. 1년 만에 커리어 마켓을 통해 190여 명이 자리를 바꿨다. 전체 인사 이동 중 80%가 이 제도를 이용한 것이다.

현대카드·캐피탈 본사 지하 1층엔 30평 남짓한 도서관이 있다. 전문서적부터 만화책까지 보고자 하는 책은 뭐든 볼 수 있게 해 준다. 매년 30명을 뽑아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해외 배낭여행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부서 강제 회식이나 등산 같은 건 절대 안 한다.

그러나 이 회사에도 금기는 있다. 이른바 ‘3대 무관용 정책’이다. 지켜야 할 세 가지 덕목은 ▶고객 정보 보호 ▶협력업체 거래의 투명성 ▶성희롱 예방이다. 문제를 일으키면 누구라도 엄벌한다.

최대가 아닌 최우량이 목표
정 사장의 목표는 가장 큰 회사가 아니다. 가장 우량한 회사다. 따라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코앞에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그는 큰 걱정을 안 한다고 했다. 충분한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란다.

“지난해부터 머잖아 나쁜 시기가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 장기 차입금을 썼다. 항상 나쁠 때를 가정하고 사업해야 한다. 내년에 취급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장기성장을 위한 투자는 더욱 확대할 예정이다. IT 투자, 신상품 개발과 거점 확대 등은 오히려 더 적극화할 것이며 제휴 마케팅과 브랜드 강화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겠다.”

현대카드·캐피탈은 요즘 신입사원을 뽑고 있다. 올해 채용 예정인원은 75명. 지난해(106명)보다 꽤 줄어든 수치다. 회사 측 관계자는 “경력사원을 많이 뽑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GE는 최근 정 사장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 내년 1월 기한이 종료되는 현대캐피탈의 크레디트라인(신용공여 한도)을 6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확대하기로 결정한 것. 예정대로라면 현대캐피탈은 1조여원을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게 된다. 2004년 8월 GE와 제휴한 이후 현대카드·캐피탈의 통합 경영실적이 매년 평균 두 자릿수 성장을 유지하면서 25%가 넘는 자기자본순수익률(ROE)을 올려온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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