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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마라도나 효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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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35면

축구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었을 때였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가 상대 선수 5명을 제치고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잉글랜드 수비수들은 “어, 어” 하는 동안 당하고 말았다.

이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되돌려 보자. 마라도나는 현란한 발재간으로 수비수 사이를 헤집고 다닌 게 아니었다. 공을 잡고선 골문을 향해 약 60m를 거의 직선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그러는 동안 잉글랜드 수비수들은 뭘 했나. 한 선수는 마라도나가 오른쪽으로 치고 나갈 줄 알고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고, 또 다른 선수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렇게 반응하는 동안 마라도나의 앞에는 빈 공간이 생겨났다. 그는 약간의 페인트 모션으로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마라도나였기에 가능했던 플레이였다.

영국중앙은행(BOE)의 머빈 킹 총재는 2005년 한 강연에서 이를 통화정책에 비유했다. 그는 마라도나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잉글랜드 선수들을 시장에 각각 비유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휙휙 올리거나 내리지 않아도 시장은 중앙은행의 움직임을 예측해 미리 반응함으로써 소기의 정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를 중앙은행의 ‘마라도나 효과’라고 불렀다.

예컨대 경기가 나빠질 때는 보통 장기금리가 하락한다. 자금수요가 위축되는 데다 시장에서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금리 인하는 결과적으로 경기 자극 효과를 낸다. 중앙은행은 이럴 때 즉각 정책금리를 내리기보다 물가를 의식해 일단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2005년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랬다.

그러나 요즘 이런 비유를 들면 다 웃는다. 아무도 중앙은행을 마라도나로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위기의 발단인 버블을 키운 것도 중앙은행 탓으로 지목되지 않는가.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자신의 경제모델에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축구장의 마라도나처럼 압도적 존재감을 지닌 것은 중앙은행보다 오히려 시장이 아닌가 싶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금융 쓰나미 앞에서 중앙은행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쓰나미가 바로 내 안방으로 들이닥칠 때까지 중앙은행은 아무 손도 못 쓰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마라도나 효과’라는 표현을 처음 쓴 킹 총재는 며칠 전 금리를 한번에 1.5%포인트나 내렸다. 한국은행도 한 달 새 기준금리를 1.25%포인트 내렸다. 둘 다 유례 없는 일이다. 마라도나처럼 카리스마적이고 도도한 드리블로 폼을 잡으려던 중앙은행들도 급하면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마침 그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이젠 축구장에서 그가 ‘마라도나 효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 볼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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