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세 실향민의 南.北 가슴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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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경호씨 일가족은 17명이나 한꺼번에 북한을 탈출해 왔는데저는 아들.딸에게 편지조차 보내면 안된다니 말이 됩니까.” 18일 오후 서울 북부경찰서 보안과 조사실.북한에 두고온 아들과불법 접촉한 혐의로 소환돼 조사받던 6.25 월남 실향민 李영수(76.가명.서울강북구수유동)노인이 볼멘소리로 항의하고 있었다. 李노인의 혐의는 북한에 사는 아들과의 편지교류 허가기간(1년)이 지났음에도 기간 경신을 하지 않고 6년간 30여차례에걸쳐 편지를 불법으로 주고받아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했다는 내용.가족 생활비조로 미화 1천6백달러와 지난해 겨울 북한에 두고온 부인이 숨질 때까지 승인받지 않고 고혈압치료제를 보낸 혐의도 받고 있다.
50년 단신 월남해 전쟁이 끝난 53년 서울에서 결혼,1남4녀를 둔 李노인이 북한에 아들.딸과 부인이 생존해 있음을 확인한 것은 91년 미국 LA에 사는 친구(76)가 북한을 다녀오면서부터였다.
“6.25나던 해 세살과 한살이던 아들.딸과 아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저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더구나 재혼도 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운 사실을 알고 미안한 마음에 돈이 생기는대로 3백~5백달러씩 푼돈이나마 보내 줬습니다.
” 그러나 40여년만에 가족의 생존을 확인한 기쁨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이듬해 어느날 방 청소를 하던 부인(66)이.북에서온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남편이 월남하기전 북한에서 결혼해 자식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부인과 가족들이 당장 편지 교환을 그만두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특히 그동안 속고 살아온데 대해 강한 배신감을 느낀 부인의 성화에 못이겨 李노인은 가족회의 를 열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야했다.
하지만 어릴때 보았던 아들.딸의 희미한 모습이 밤마다 떠올라가족들 몰래 다시 연락을 시작했고 지난 9월 부인에게 들키고 말았다.화가 난 부인은 중간에서 편지전달은 물론 송금역할을 해준 남편의 친구를 간첩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고 조사과정에서 李노인도 불구속 입건됐다.
“반평생을 생사를 모르고 지내온 아들.딸이 고향에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애비로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샘조사로 초췌한 모습의 李노인은 법을 어긴건 잘못이지만 두고온 아들.딸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 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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