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 칼럼

유럽이 지금 해야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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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현재 지구촌에는 심각한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새 대통령을 뽑았지만 취임 전까지는 정치 공백기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게다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과거 그 어떤 레임덕 상태의 대통령보다 더 허약해 보인다. 이로 인해 지구촌 권력지도에 공백이 생겼고 최근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이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유럽이사회 의장이기도 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루지야 전쟁 때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들을 소집함으로써 유럽통합의 전위그룹 역할을 하는 이들 나라의 힘에 의지해 위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유럽연합(EU)이 갖고 있는 금융·통화 부문의 강력한 제도적 기반이 도움이 됐다. 공동통화로서의 유로화, 유럽중앙은행(ECB),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규정된 공동예산과 각국의 채무 기준 등이 그것이다.

물론 위기는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약간의 시간과 숨을 깊게 들이쉴 수 있는 여유를 얻었을 뿐이다. 문제를 일으킨 주택담보대출 시장 뒤에는 또 다른 거대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미국에선 신용카드와 차량구입 대출 등이 다음 타자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와 더불어 실물경제에도 쓰나미가 삼킬 듯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다.

금융위기에 이은 실물경제의 비극적인 침체는 EU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미국 성장엔진의 고장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아시아와 중국의 경기부양으로 대체될 수 없다. 이는 세계경제가 깊은 장기침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EU는 지구촌 금융위기에 잘 대처해왔다. 유로화와 ECB,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그리고 사르코지 대통령 덕분이었다. 하지만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위기가 연계돼 있다는 점이 유럽에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역으로 이는 유럽에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단순하게 보면, 유럽 각국은 이 정도 규모의 위기에 각자 대처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 오직 EU만이 모든 유럽인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유로화와 ECB로 튼튼한 제도는 갖춘 반면 다가오는 경제위기에 대처할 만한 적절한 정치적 상부구조가 여전히 없다는 게 문제다.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는 유로존을 위한 유럽경제정부의 창설을 주장해왔다. 그런데 독일이 거부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가 EU 회원국의 재정적자 한도 규정을 무력화하고 ECB 독립에 반대하기 위한 술수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지구촌 경제·금융 위기를 고려한다면, 독일은 유럽경제정부에 대한 반대를 포기하고 그것을 창설하는 쪽으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결국 금융시장에서 위기가 계속되고 실물경제에서도 엄청난 침체가 동반된다면, EU는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즉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EU 차원에서의 거시경제적 조정이 시급히 필요한 상황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독일 재무장관은 최근 몇 주간 범한 자신들의 실수를 신속히 깨달아야 한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도록 기다리는 것은 좋지 않은 전략임이 판명났다. 그래서 독일 정부가 프랑스의 주장을 회피하기보다는 ECB의 독립성과 EU 회원국 재정정책의 틀이 지켜지는 범위 내에서 유럽경제정부의 원칙들을 규정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EU는 앞에 놓인 깊고 긴 위기에 대처해나갈 경제정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독일 경제는 그 길을 단호하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
정리=박경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