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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가정문화>24.죽음맞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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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 풍습에는 다가올.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금기(禁忌)시하는 경향이 있다.달갑지 않은 말을 굳이 입에 올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죽음에 관한 논의는 성(性)교육과 같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다.성에 대 해 말하기 꺼려하고 쉬쉬한다면 사회문제로 야기될 수 있듯 죽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가족관계속에서 한 사람의 죽음은 가정에 주는 충격이 가장 큰 것이므로 평소 죽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비로 혼란과 슬픔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두달전 세상을 떠난 박모(73)씨의 경우는 삶속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3남3녀의 자녀를 출가시키고 얼마전 아내와도 사별한 그는 10억원 가까운 재산이 있던 자산가.그러나 맏아들과는 뜻이 맞지않아 함께 살지 못하고 셋째아들집에 거처하다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 집안의 분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평소 가족들에게“재산의반은 셋째에게 준다”고 공언해놓고 아무런 법적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그러자 셋째는 아버지의 말을 근거로 유산의 반을 주장했고 나머지 형제들은“아버지가 그냥 한 말을 두고 재산의 반을가지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가족간의 갈등은 장례를 치르면서 사사건건 금전문제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박씨는 초라한 장례식에 볼품없는 묘자리에 묻히고 말았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팔십 평생을 보내고떠나는 길에 가족들의 진정한 애도 한번 받지 못 한 것이었다.
지난 9월 세상을 떠난 서성자(徐星子.80.서울서대문구연희동)씨는 작고 한달전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서씨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사회단체에서 회계사무를 맡는등 자원봉사에 열심이었다.한달정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안후 병원에 입원 한 서씨는 자신이 보고싶은 사람들을 불러“그간 감사했어요”라며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눴고 남편에게는“슬퍼하지 마세요.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텐데요”라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전했다.그리고 서씨가 봉사하던 곳의 후임자도 불러 하던 일의 인 수인계를 마치고 자신의장례식 추도사는 절친한 친구에게,설교는 목사님에게 부탁하는 마지막 편지까지 남겨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서울대 정진홍(鄭鎭弘.종교학과)교수는“죽음은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첫 순간입니다.죽음맞이가의연하고 밝은 모습이기를 원하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죽 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죠”라고 조언한다.
윤달이 들었을때 수의를 미리 지어놓는 우리 고유의 풍습은 .
명이 길어진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평상시 죽음을대비하는 한 자세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는 수의뿐 아니라 다른 절차에서도 준비가 필요하다.
변호사 정종희(丁鍾熙.내외합동법률사무소)씨는“자녀가 장성한 때에 이르면 유언.묘자리.장례식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며“특히 재산에 관련한 유언은 자필증서.공증증서등 종류가 많고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아니면 자녀들과 합리적인 조정을 통해 매듭지어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일러준다.
최근 일부에서 일고 있는 호화분묘등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볼 만한 과제다.“장례식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거나 번거로운 것은 점차 지양해야 하며 좁은 국토를 생각할때 지금의 매장풍습을 탈피,납골당이나 가족공동묘를 선택함으로써 후손을 배려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녹색연합 장원(張元.대전대 교수)사무총장의 견해를 귀담아둘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사회에선 죽음에 대한 벽을 허무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다..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주최의 잇따른 강연회,올해 서강대의.죽음학'강좌 개설,녹색연합 회지에.저명인사들의 사전유서'싣기 등은 작지만 힘있는 걸음 들이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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