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흑인 퍼스트 레이디 … “가족·여성·자원봉사 분야 챙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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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데는 누구보다 부인인 미셸(44)의 역할이 컸다.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될 미셸은 오바마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언자다. 오바마 캠프 관계자들은 “미셸은 가족을 돌보는 데 우선 치중하고 그 다음에 여성문제, 자원봉사,이라크 귀향 군인 가족문제를 챙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에게는 말리야(10)와 사샤(7) 등 어린 두 딸이 있다. 그러나 미 언론들은 미셸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와 같이 조용한 내조자 역할에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선 초기 미셸은 본의 아니게 오바마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미국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발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보수 언론들은 “미셸이 남편을 치마폭에 싸고 돈다”며 ‘오바마의 베이비 마마’라는 별명을 붙였다. ‘화난 미셸, 분노한 흑인 여성’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종반부에 갈수록 그의 능력은 빛났다. 노동자 계층 여성들, 아이를 키우는 월마트 맘의 표심을 잡기 위해 발로 뛴 것은 미셸이었다. 힐러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오바마 지지 유세에 등장했던 반면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는 이들을 잡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개 유세를 뛰었다. 그러자 오바마 캠프는 여성표 공략을 미셸에게 의지했다. 미셸은 남편과 별도로 경합지역을 돌면서 ‘일하는 엄마의 고민을 나누자’고 호소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미셸이 마음을 결정하기 못한 유권자를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캠프 내에서 ‘마무리 투수(the Closer)’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했다.

오바마는 프린스턴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대 법대를 나온 똑똑한 여성 미셸에게 끌려 결혼했다. 가정적인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미셸의 ‘안정감’에 매력을 느꼈다고도 한다. 여러 곳을 떠돌고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오바마와 달리 미셸은 시카고 전통 흑인지구 사우스사이드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 오바마에게 부족했던 ‘뿌리’와, 흑인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의 집요함·투지·재능 등은 힐러리를 연상시킨다. 그의 오빠는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 동생은 자기가 이길 때까지 계속 하자고 했다. 지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프린스턴대에 가서 인종적 정체성을 강하게 느꼈다. 기숙사에선 백인 친구의 어머니가 흑인과는 방을 같이 쓸 수 없으니 방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했다. 총명함과 좋은 성적에도 교수와 백인 학생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당시 1100명의 학생 중 흑인은 94명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흑인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게 됐고, 나중에 보수주의자들에게 ‘백인에게 반감이 있는 인종주의자’라고 공격받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 진출 뒤 그는 주로 흑백갈등을 봉합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특히 그의 경력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시카고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대외협력 담당 부원장으로 일할 때는 병원 안팎 커뮤니티를 연결하고, 갈등과 오해를 없애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최지영 기자

마무리 투수

오바마의 당선엔 부인 미셸의 여성표 공략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남편과 별도로 경합지를 돌며 여성 유권자들, 특히 노동자 계층 여성과 아이를 키우는 월마트 맘 등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발로 뛰었다. 미셸은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를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캠프 내에서 ‘마무리 투수(the Clos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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