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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지향의 한국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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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붓과 칼.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좋은 비유도 없다. 김용운(金容雲)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인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제시한 키워드다. 일본이 칼(武)에 의한 수직.세로의 사회라면, 한국은 붓(文)에 의한 수평.가로의 사회라는 것이다. 金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인에게는 강한 평등의식이 있고 그것이 유럽 근대화의 기본정신인 자유.평등에 직결된다고 보였다"고 썼다.

그렇다. 확실히 우리 민족의 염색체엔 평등 유전자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원시 공산사회가 끝나고 계급이 생겨났지만 우리 피 속엔 평등정신이 면면히 흘렀다. 임금과 백성이 함께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여러 군데 나온다.

가끔 보는 TV드라마 '무인시대'에도 이러한 평등의식은 잘 드러난다. 고려 무인정권을 다룬 이 드라마는 평등을 넘어 아예 하극상이 철철 넘친다. 칼자루를 쥔 무인들이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안다. 심지어 소금장수 아들 출신인 이의민은 임금(의종)의 등뼈를 꺾어 살해하기까지 한다.

무인뿐이 아니다. 최충헌의 가노 만적은 후일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느냐(王侯將相 寧有種乎)"며 난을 일으킨다. 최근 '한국사 이야기' 22권을 완간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이를 한국판 노예해방 운동의 서곡으로 본다. 어쨌든 농민 출신인 한고조 유방(劉邦)이 처음 했다는 이 표현은 이후 백성들이 툭하면 입에 올리는 말이 됐다. 백성들이 고관대작들을 욕하는 사극 장면엔 으레 이 말이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 왕조시대가 평등사회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불평등과 차별은 곳곳에 존재한다. 그래도 굳이 이어령 선생의 표현('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빌리면 우리나라를 '평등지향의 사회'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평등지향 정신은 많은 것을 이루게 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옛날의 과거나 지금의 고시가 그렇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부작용도 있었다. 그러나 나도 땅을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내 비록 더럽고 힘든 일을 하지만 자식에게는 절대 이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열심히 일했다. 내 비록 일자무식이지만 자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부를 시켰다. 우리가 이 정도나마 먹고 살게 된 원동력인 근면과 교육열의 이면엔 이처럼 긍정적인 평등지향의 정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매사 지나치면 모자라니만 못하다. 평등지향은 점차 평등만능주의로 변해 갔다. 잘난 놈 뒷다리 잡아 끌어내리는 하향 평등화도 좋다는 인식이 퍼졌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 세태가 됐다. 대표적인 게 실패한 교육 평준화다. 요즘 대책이라고 나오는 게 서울대 폐지론이다. 서울대를 폐지하고 국립대를 평준화해 어쩌자는 건가. 대학 평준화의 대명사인 독일의 좌파정권이 최근 왜 일류대를 만들기로 했는지 생각해 보라.

이제 우리 사회의 중심축은 왼쪽으로 이동했다. 진보좌파 대통령에 의회까지 좌파가 장악했다. 역사적으로 좌파는 자유보다 평등을,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해 왔다.

그러나 평등이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하향 평등화가 우리의 지향점일 수는 없다. 남미나 북한이 우리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세계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를 고만고만한 중소기업으로 쪼개는 것보다 삼성전자를 10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 10개가 있으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는 저절로 이뤄진다.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이를 새겼으면 좋겠다.

유재식 문화.스포츠 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