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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미래를 위한 과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조선총독부 건물은 대한민국 독립후 중앙청 건물이 돼 일제 강점기간 이상 긴 기간 봉사했다.그러다 일제잔재 청산 이데올로기가 득세하게 돼 헐려나갔다.부끄러운 얘기지만 이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 옳으냐,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냐 하는 의 논이 분분했던 때 나는 어떤 쪽으로도 판단을 정하지 못했다.그런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꼈다.
이 건물이 완전히 철거됐다는 뉴스를 읽은 다음 그 현장에 가보았다.근처의 고층건물에 올라가 철거 자리를 조망하기도 했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역시 뜯어내기를 잘했군.”이렇게 혼자 소리내어 중얼거렸다.그날 나는 총독부에 가려지 지 않고 정면에 나선 경복궁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후 며칠 안돼 나는 경복궁 망령(亡靈)에 씌고 말았다.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이 나에게 경복궁을 연상시키곤 한다.이 연상(聯想)에 시달린 나머지 차라리 총독부가 경복궁을가려주고 있었던 때가 낫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총독부가 일제침략의 상징이었다면 경복궁은 조선망국 책임의 상징이다.지금은 침략자의 자취는 없앴고,주인이던.경복궁 왕조'가저질렀던 망국의 죄만 남아 있다.이 둘이 같이 있었을 때 어떤눈에는 망국과 침략이 평형을 이루거나,우뚝한 침략의 석조건물이꾀죄죄한 망국의 목조궁전 앞에 나서 있는 바람에,대부분의 눈은침략자의 악행(惡行)만을 찾아 원한을 씹었다.
경복궁 왕조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유교였다..대학(大學)'의 이른바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처럼 동서고금(東西古今) 어디에 내놓아도 활달하고 자상한 이상적 정치요체가 어디 또 있을까.삼강령은 정치의 목표를.밝은 덕을 밝히고,백성을 새롭게 하고,지선(至善)에서 그치는 것'이라고 천명한다.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따로 떼어놓았을 때 훌륭하면 훌륭한 것일수록 독재정치와 결합되면 그 정치의 무능이나 잔인을 감추고 위장하는 선동 내지 포장으로 반드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중세 암흑시대의 기독교, 옛 소비에트연방의 겆산주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유교도 그랬다.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이데올로기는 좋았는데 운용이 잘못됐다거나,왕은 훌륭했는데 신하가 나빴다는 등의 변명이다.
재미 북한연구가 김영훈 박사에 따르면 북한을 지배하는 단말마(斷末魔)적 선동가들은 지금.충효(忠孝)'사상 고취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부모가 기뻐하는 것을 하는 것이 효도다.나라가 기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충성이다.원쑤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돌아가신 어버이 원수님의 소원이었다'이렇게 논리를 편다고 한다.거기에다 단군(檀君)과 백두산(白頭山)을 추가해 명분의 길이를 억지로 늘였다고 한다.그리고 김정일 자신은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사람의 문화적 특질 가운데 하나는 명분(名分),즉 이데올로기에 약하다는 점이다.이것은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명분에 대한 경도(傾倒)가 심해지면 단어 하나만 들어도 최면에 걸린다.북한 지도자들이.주체'라는 말을 선점(先占)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최면이 남한 사람을 벌렁 넘어지게 했던가.지금은 거기에다 단군.백두산.충효까지도 저들이 거머쥐려 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자 중앙일보에는 참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기고문이 실렸다.미국 진보정책연구소의 로버트 매닝이 쓴 글로.김일성체제가 무너진 뒤 북한정권의 과거 잘못과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북한 권력 엘리트'를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메시지를 지금부터 그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약소민족으로서 우리 과거는 너무 많은 남으로부터의 모욕과 우리 자신의 머저리짓으로 뒤범벅돼 있다.이것은 쓸어낼 수가 없다.총독부가 남으로부터 받은 모욕이라면 경복궁은 우리가 저지른 오욕이다.만일 총독부를 꼭 헐어야 했다면 경복궁을 헐어야 한다는 주장이 언제 불붙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고려가 신라의 경순왕과 왕릉을 잘도 보존했듯이 평양정권의.유정(有情),무정(無情)' 모든 존재를 통일후에도 보호.보존하겠다는 메시지를 지금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 다.
헐지 말았어야 하는 총독부 건물 없이 이제 홀로 남은 경복궁의 잘못을 중화시켜 줄 평균율은 주체사상탑도 하나의 역사교과서이므로 보존해 주겠다는 것,그것이 아닐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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