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풍경] 3년 만에 활동 재개 임동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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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성의 집‘쟁이골’에서의 임동창. 집 뒤로 펼쳐진 밀밭이 마치 음악인 양 끝없이 물결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가다."

4년 전 EBS-TV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에서 피아노.뽕짝.사물놀이를 뒤섞는 비빔밥 음악으로 펄펄 뛰는 신명을 이끌어내던 괴짜 임동창(48)이 던졌던 말이다. 그건 자유의 초대였다. 음악을 떠나 죽은 지식의 더미에서 용감하게 탈출하라는.

이전 SBS-TV '송지나의 취재파일'에서도 그랬다. 음악캠프 참가자들에게 임동창은 대뜸 "죽어 버려라"고 일갈했다. 시체처럼 땅바닥에 쓰러지는 체험을 통해 '가짜 나'와 작별하라는 주문이다. "베토벤 대신 네 음악을 해봐!" 벽력같이 질러대던 고함도 쟁쟁하다. 러닝셔츠 차림의 맨발로 겅중겅중 뛰며 잡아먹을 듯 피아노를 두드려대던 박박머리의 국악 피아니스트 임동창.

기억하시는지. 그는 EBS 마지막 방송 때 "결과물 내놓을 때까지 두문불출 공부만 하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꼼짝않고 경기도 안성 '쟁이골'에서 3년 칩거를 해왔다. 임동창의 '사람풍경'은 다음 주 활동재개를 앞두고 이뤄졌다. 중학생 때 '피아노 무병(巫病)'이란 신비체험, 그 이후 "나를 모르고 어찌 내 음악을?" 하는 의문 때문에 뛰어든 입산(入山)과 환속…. 알고보니 그에게 음악과 삶은 하나였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도깨비'다. 하지만 이시영 박사, 손광운 변호사 등은 유일한 국악 팬클럽 '동창이 밝았느냐'를 만들어 당신을 후원한다.

"해서 고맙다는 마음을 표할 겸 지난 3년 내 공부가 일단 끝났음을 보고하는 첫번째 자리를 다음 주말 내 집에서 갖는다. 신통한 무엇을 한 바 없는데 부끄럽게도 이름부터 났다. 이제 4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내 음악의 가능성에 공감해준 그분들에게 결과물을 보여드릴 생각이다."

-살아온 내력부터 들려달라. 피아노 귀신에 씌었던 10대 시절 얘기부터….

"집안이 가난했던 나는 군산 남중학교 시절 학교 최고의 주먹으로 놀았다. 그러니 2학년 첫 음악시간인데도 친구들과 정신없이 떠들고만 있었다. 한데 내 몸에 뭔가가, 피아노가 쑥 하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정말 느닷없이. 선생님이 '고향집에 홀로 계신/어머님 그리며~'를 반주할 그 무렵인 걸 생생히 기억한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그 신비체험이란 신내림 같은 걸까?

"그런 거다. 수업 뒤 선생님을 찾아 대뜸 '저 피아노 치고 싶어요'했다. 막 바로 피아노에 앉아 난생 처음 들었던 반주를 그대로 재현했다. 이후 독학으로 하루 열 다섯 시간씩 피아노에 미쳐 살았다."

-예전에 TV에서 봤더니 성적은 몽땅 '가'와 '양'으로 깔린, 전교 꼴찌였다던데….

"수업? 깡그리 무시했다. 피아노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그 사건 직후 키가 눈꼽만큼도 안 컸다. 지금 내 키(170㎝)가 그때 키라면 믿을 수 있나?"

-일단 갈 데까지 가보자. 그럼 '작곡의 신'에 씐 건 언제인가?

"고1 때다. 느닷없이 몸에서 멜로디가 줄줄 새 나왔다. 주체 못하고 받아 적기 바빴다. 서울 명동 대한음악사에서 쇤베르크 '12음기법'과 김달성 '화성법'을 사서 공부했다. 산처럼 쌓인 악보 일부를 서울대 백병동 교수에게 보냈다. '음악은 됐다. 테크닉을 다듬어라'는 말을 그때 전해 들었다."

-그런 공부가 중노릇과는 어떻게 연결되나?

"음악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며 공부할 무렵이다. 밤에 책상 앞에서 깜빡 졸다가 괘종시계가 세번 쳤다. 댕 댕 댕…. 벌떡 깨 새벽이구나 싶어 선생님께 '세 시입니까'하고 여쭸다. '이놈아, 열두 번 쳤다'하는 말을 듣는 순간 퍽 하고 나자빠졌다."

-왜? 영문을 모르겠다. 한 소식을 들은 건가?

"글쎄다. 자, 소리는 귀로 들어온다. 하지만 듣는 나는 따로 있다. 과연 그 놈의 정체를 모른다면 몸에서 흘러나오는 건 내 음악은 아니다. 그건 모차르트일 뿐이니까. 수 년 번민 끝에 결심을 굳혔다. 중이 되기로.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에게서 계(契)를 받았다. 법명은 보림(寶林)이었다."

그때가 스물 한 살. 입대 뒤 화두 '이 뭐꼬'를 풀고 싶어, 내 음악을 찾고싶어, 탈영과 영창생활까지 했던 얘기는 건너뛰자. 임동창은 제대 뒤 환속, 작곡가 최동선 교수 권유로 서울시립대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컬트 국악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을 얻은 건 국악에 뛰어든 1990년대의 일이었다.

-좀 쉬어가자. 태평소 연주자 장사익의 가수 데뷔도 당신 때문이라는데.

"국악 할 때 만난 그를 마구 부추겼다. 세상에 나왔으면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가라고. 단 평소 놀던 가락대로만 하라고 일렀다. 내 피아노 반주로 만든 음반 '하늘 가는 길'은 그때 나왔다. '찔레꽃'이 담긴 그 음반. 그 무렵 김덕수 형님도 만났고, 연극.현대무용 등과 만나는 실험작업을 거듭했다."

-벙벙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신앙 간증이 따로 없다. 당신의 말을 사람들이 쉬 믿을까?

"글쎄, 중2 이후의 삶은 음악을 찾는 모색이었다. 그게 음악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떤가. 단 하루도 허툴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국악을 모태로 한 새로운 음악을 위해 저 위의 누가 나를 콕 찍은 것도 같다. 자랑이 아니다. 공자 말씀대로 내가 창작한 것은 없는(述而不作) 셈이니까."

-물건을 봐야지 믿거나 말거나 할 것 아니냐?

"조금 기다려달라. 3년 작곡한 작품이 그 근거다. 단 예전 나의 모든 활동은 '내 음악의 고조선'시절, 즉 예비작업이었다는 말을 해둔다."

-조금만 더 설명해 보라.

"우리 국악 중의 정악에 해당하는 '영산회상' '수제천'의 DNA를 추출해 서양음악 최고봉인 바흐도 넘어서고 윤이상도 추월하는 작업이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가였던 우리들의 음악을 되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간결하면서도 꽉 찬, 그리고 매우 쉬운 음악일 수 있다."

알쏭달쏭한 화두의 연속이다. 2년 전 임동창과 재혼한 부인 이효재(한복디자이너)씨가 한번은 몰래 남편 사주를 봤다. 했더니 장군.어린아이.스님의 모습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단다. 정말 그렇다. 임동창은 에너지 덩어리의 열정을 보이는가 하면 세상 모르는 '고독한 지존(至尊)'이란 이미지도 함께 있다. 한 달새 다섯 차례 만나면서 받은 느낌도 그랬다. 그러나 투박하면서도 간결한 그의 발언은 진지하다. 해서 도무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런 임동창은 별난 삶 탓에 친구들이 많지 않다. 안성의 이웃인 시인 고은을 부모님 모시듯 하는 것도 그 때문일까? 머리가 아프면 전국의 강호를 떠도는 선객(禪客)음악가, 박물관에서 오래된 유물을 들여다보는 걸 즐기는 그 사람의 다음 삶, 다음 음악을 기다려볼 일이다. 애정을 가지고.

글=조우석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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