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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영국의 '히든 카드' 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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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열 크레슨트

▶ 바스시 전경(왼쪽)과 로만 바스 유적지.

여행을 하면서 남들이 흔히 가는 명소보다는 그 주변 어딘가에 숨은 뒷골목을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최근 영국 서머셋주의 작은 마을 바스(Bath.영국식 발음으로는 '배스'가 아니라 '바스'다)를 처음 찾은 느낌이 그랬다. 영국 도시 중 런던보다 유명한 곳이 더 있으랴.

리버풀도 비틀스 팬들에게는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하지만 바스가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에든버러와 함께 매년 1, 2위를 다투는 곳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런던 시내의 패딩턴 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자동차로는 2 시간30분) 20분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런던 여행길에 욕심을 부리는 이들이 흔히 들러보는 옥스퍼드.케임브리지.윈저 성(城)에 비하면 바스는 그동안 숨겨진 마을이었던 셈이다.

◆ '세계문화 유산의 도시'

런던에서 서쪽으로 173㎞ 떨어진 곳에 자리한 바스는 인구 8만명의 아담한 도시다. '목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은 영국 유일의 온천지로, 빠듯한 일정의 유럽 여행에서 잠시 '어슬렁거리는' 기분으로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온천욕을 할 수 있냐고? 20세기 이후로는 온천욕은 옛날 얘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야심찬 대규모 온천장(Thermae Bath Spa)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코앞이니 이곳이 온천지로 옛 명성을 되찾는 일도 시간문제인 듯하다.

바스는 한마디로 도시 전체가 공원이자 박물관이다. 가는 곳마다 유적지가 넘치는 영국에서도 유일하게 '세계문화 유산의 도시'(유네스코 선정)라면 짐작이 갈 것이다. 과거에 휴식과 사교를 원하는 귀족들을 유혹했던 이곳은 이제 2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에 매료된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유적 보호 규정이 워낙 엄격해 바스 사람들은 자기 집도 마음대로 못 고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단다. 영화로웠던 한때를 입증하듯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들, 자동차보다는 마차가 더 어울릴 듯한 거리, 무도회를 즐긴 귀족 여성의 화려한 의상과 구두는 물론 이들의 시중을 들던 하인들의 고단한 일상까지 속속들이 보여주는 박물관들…. 게다가 200년이란 시간을 비웃듯 2000년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1세기 때 건축된 로만 바스(Roman Bath:로마인들이 건축한 목욕탕) 유적지를 만나는 경이로움!

◆ 제인 오스틴의 명작 무대

분주한 런던을 뒤로 하고 바스로 떠난 날, 촉촉한 습기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공기로 뒤덮인 작은 마을이 상상 속의 풍경화처럼 차창에 걸리니, 벌써 바스다. '오만과 편견' '설득'을 썼던 작가 제인 오스틴이 작품을 쓰던 곳. 특히 그녀의 소설 '설득'은 바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 중 노처녀 여자 주인공이 이곳을 싫어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는 점이다. 바스에서 만난 50대 영국인 주부는 "제인 오스틴이 바스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귀띔해줬다.

이유는 눈이 너무 부시다는 것. 이곳의 건물들은 일명 '바스 스톤'(아이보리색 돌, 지금은 색이 모두 바랬다)으로 지어졌다. 석조 건물들이 무수히 지어지던 제인 오스틴 시대에는 햇살이 비치면 마을 전체가 눈이 몹시 부셨다는 얘기다. 바스는 '제인 오스틴 센터'를 갖고 있을 만큼 그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정작 허를 찌르는 뒷얘기를 듣고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 걸음 걸음 역사가 밟힌다

제인 오스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시 야심만만한 도시계획에 의해 지어진 거대한 석조 건물들이 이곳에서는 큰 볼거리 중의 하나다. 19세기 들어 휴양지로서의 명성과 인기를 브라이튼이나 본머스 등의 해안도시에 빼앗기기 전, 유행을 좇아 몰려드는 귀족들이 머물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마을 북쪽에 자리한 로열 크레슨트와 더 서커스(The Circus)의 거대한 건물이 압권이다. '크레슨트'(crescent)란 '초승달'이란 뜻. 4층 높이의 이 건물은 각기 입구가 다른 저택 여러 채가 거대한 한 동의 빌라처럼 길게는 수백미터 길이로 이어져 있다. 그것도 일직선이 아닌 반원형으로.

누군가 전해주기를 최근 로열 크레슨트의 30호 중 한 집이 400만파운드(약 85억원)에 팔렸단다. 세상에! 그렇다면 30호가 이어진 로열 크레슨트의 값어치는? 몇 푼 없는 이방인이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대충 계산해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친절하게도 바스 보존협회는 이 30호 가구 중 1호를 박물관으로 꾸며놨다. 안경과 더불어 방 한 구석 책상에 놓인 1798년 11월 3일자 지령 4298호 신문 '더 타임스', 앙증맞게 새앙쥐용 쥐덫까지 챙겨놓은 반지하층의 부엌과 한 사람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규모의 하인용 계단…. 영국인 특유의 꼬장꼬장한 기질과 섬세한 솜씨 덕분에 200년이란 시간이 잘 박제돼 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 신세를 질 일이 없다. 1539년에 지어진 바스 대성당, 에이번 강을 가로지르는 펄트니 브리지(1774년), 1879년에 오픈된 영국 최초의 백화점 졸리스(Jollys), 1835년 찰스 디킨슨이 작품을 쓰러 와 즐겨 찾았다는 선술집…. 가벼운 발품으로 곳곳에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과거의 시간들과 마주할 수 있다.

맑은 공기에 취해 뚜벅이의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마을 한가운데서 만나게 된 로마식 목욕탕 박물관. 이곳은 1세기 때 로마인들이 브리타니아를 점령하고 건축해 놓은 곳. 대리석으로 만든 대욕장과 사우나탕, 미네르바 신전 등 거대한 로마시대의 목욕탕 흔적을 따라가는 데 1시간 이상이 든다.

아무리 바빠도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집(1482년)인 살리 런스(Sally Lunn's)에서 점심을 건너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일이다. 1680년에 식당문을 열어 30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이유를 모르고 어떻게 발길이 떨어질 것인가. 달리기 경주하듯 휙 훑고 지나가야 하는 영국 여행인 경우, 대부분은 미라가 전시된 런던 대영박물관 이집트관에서 '증명'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그렇게 서둘러야 한다면 바스 얘기는 잊는 게 좋다. 미안한 얘기지만 바스는 유서깊은 소도시의 매력을 아는 이들만을 위한 곳이므로.

글=바스 이은주 기자
사진 제공=영국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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