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기행>뮌헨 이자르 강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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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미술관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해가 반짝 났다.현대 미술의 어두컴컴한 상상력의 창고에 갇혀있다가 다시 대낮의 햇살 아래 서있으려니 조금 어지러웠다.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시원한 공기를굶주린듯 가슴 뻐근하게 들이마셨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등지고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그 뒤가 바로 유명한 「영국정원」 입구다.뮌헨을대표하는 공원에 왜 그런 엉뚱한 이국적인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추측컨대 프랑스의 경우처럼 기하학적으로 조성된 공원이 아니라 영국식으로 자연스런 맛을 살린 공원이란 뜻인 것같다.어디엔가 있을 숲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 사이 비가 꽤 왔는지 땅이 젖어있다.이윽고 다리 앞에 이르러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꼭 한국의 장마철에 범람한 강처럼 제법 크게 울리는게 아닌가.뮌헨시 외곽을 가로지르는 이자르강은 그리 큰 강은 아니다 .유럽 다른도시의 강들과 마찬가지로 폭이 좁아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강이라기 보단 개울에 가깝다.그래서 그만 속으로 무시했던 모양인데,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살이 급류를 이루며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며칠째 감질나게 오다말다 뿌리던 가는 빗방울이 모여 어느새 이처럼 도도한 흐름을 이루다니,자연의 이치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울창한 숲입구에 멈추어 서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이 길로 계속 걸어 들어가면 거대한 정원이 나오리라는 걸 나는 안다.우거진 녹음의 한가운데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을 것이다.그 비밀의 화원에서 어쩌면 나그네는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쯤 낚을지도 모른다.하지만,피곤한 나는 아쉬운 대로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언젠가 다시 찾기 위하여… 발길을 되돌렸다.그 때였다.머리위 어디선가 후두둑,물방울 하나가 내려와 떨어졌다.아마도 나 뭇가지 끝에 걸려 미처 지상으로 추락하지 못했던 빗방울이었으리라.차가운 액체가 이마를타고 흘러 뺨에 닿는다고 느끼는 순간,혼곤한 감상에 잠겨있던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상쾌하면서도 찌르는듯한 전율이 온몸으로 전달됐다.언제 뿌려진비였을까.어제 내린 비였나.한시간전,아니면 방금 내려온 싱싱한것이었나.내 뜨거운 이마에 와닿는 순간,조금전까지도 산 가지에얹혀 숨쉬던 물방울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증 발해 버릴 것이다.나는 살아있다는 것,살아서 과거의 비를 맞는다는 사실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비틀거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빈다.그날 그 뮌헨의 숲에서 날 소스라치게 했던 빗방울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현재에 둑,내려앉기를… 어느날 문득 기억의 숲에서 솟아올라 그를 깨우기를… 나는빈다.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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